(58)“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주중적국’ 알고 계시지요”
(58)“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주중적국’ 알고 계시지요”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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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성구, 유옥 후임으로 대정현 도임
곽심, 제주점마별감…수령 비행 고발
곽월, 승문원정자·영천군수 등 지내
곽흘, 을묘왜변 왜구 침략 적극 대비
관음보, 공민왕 때 제주 목호난 참여
광해군, 대동법·일본 외교 등 성과
해방 직후 촬영된 제주시 삼도2동에 위치한 관덕정의 모습. 조선조 제15대 군주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강화도의 교동으로 유배되고 또 제주로 이배됐다. 광해군이 중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관덕정으로 빈소를 옮겨 대제를 봉행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해방 직후 촬영된 제주시 삼도2동에 위치한 관덕정의 모습. 조선조 제15대 군주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강화도의 교동으로 유배되고 또 제주로 이배됐다. 광해군이 중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관덕정으로 빈소를 옮겨 대제를 봉행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곽성구郭聖衢현종 때의 대정현감. 1663(현종4) 1, 유옥柳沃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65(현종6) 8월에 떠났다.

곽심郭諶문신. 제주점마별감點馬別監. 본관은 현풍, 곽보완郭保完의 아들로 태어났다.

1482(성종13) 친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은 병좌정兵佐正, 14899월에 봉직랑奉直郞 사헌부 지병으로 임명됐다.

1490(성종21) 11월 검토관 김물金勿이 보고하기를 제주점마별감으로 대정현에 향하던 중에 부로父老가 울면서 현감이 진상을 칭탁해 명주와 누에고치를 함부로 징수하는 등 강제 징수가 가혹합니다. 또 수령과 자제子弟 및 군관들이 사냥 때면 민마民馬를 빼앗아 타고 다닌다.’고 했다. 이렇게 제주의 민폐는 수령의 죄이니 잘 골라 위임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제주에서의 행정이 극히 문란했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

조정에서는 도승지 신종호가 김물의 보고에 의의를 걸어 모든 폐단은 수령의 허물만이 아니고 김물은 신진 서생으로 그의 의견이 반드시 합당한 것만은 아니라 해서 지방 수령의 개차改差는 없었다.

149010월 곽심과 김물金勿이 제주목사에게 지시하기를 듣건대 경이 해마다 민폐를 혁파하고 목사의 직무를 다한다니 가상하게 여긴다.

그런데 근일 절일마다 삼읍 수령이 목사청牧使廳에게 주연을 베풀면서 민폐가 심하니 이를 엄히 폐지하라며 조정에 복명하면서 내려진 교지가 있었다.

 

곽월郭越1521(중종13)~1586(선조19), 문신. 제주목사. 호조참의, 본관은 현풍. 자는 시정時靜, 호는 정재定齋. 아버지는 사성 지번之蕃, 아들은 의병장 재우再祐. 1546(명종1)에 사마시에 합격, 155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곽월은 무재武才를 겸비해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큰일을 맡길 만하다 여겨졌다.

그는 승문원정자·영천군수를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2(선조2)에 관직에 복귀해 지평, 이듬해 장령, 그 이듬해 사간, 1576년에 의주목사, 그 뒤 호조참의를 거쳐 1578년에는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했고, 1581년에 제주목사가 됐다.

곽흘郭屹무신. 제주목사. 전라병마절도사로 있었는데 1565(명종20) 12, 목사 변협邊協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686월에 대호군大護軍으로 제수되어 떠나자 세인들이 명환名宦이라고 칭했다.

목사 변협이 부임하기 10년 전에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는데 왜변 당시 왜구들이 화북포로 상륙, 제주성을 공략, 고능高陵(제주성 동쪽 丘陵)에 왜구들이 점거해 주성 안으로 화살을 쏘았다.

이후 10년 동안 방호가 미비한 상태였는데 곽흘이 부임, 군정軍政을 정비, 주성 동쪽을 퇴축해 성의 주위를 넓히고 무기를 보수하면서 국방에 대비했다.

관음보觀音保고려 공민왕 때의 제주 목호난牧胡亂 참여. 앞서 탐라의 삼별초난이 평정된 뒤 원나라에서는 군민 총관부軍民摠管府-軍民安撫司를 두고 동서에 아막阿幕(=牧舍)을 세워 가축을 방목, 다루가치達魯花赤(원나라의 관리·우두머리)로 감독시켰다.

이들과 고려의 관리들 사이에 자주 갈등과 마찰이 있었다.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고려는 1374(공민왕23)에 명나라에서 말 2000필을 요구해 오자, 제주에서 징발하게 되니 목호 석질리·필사초고·독불화·관음보 등이 난을 일으켰다.

 

제주시 이도1동 광해군이 살았던 터에 있는 비석.
제주시 이도1동 광해군이 살았던 터에 있는 비석.

광해군光海君1575(선조8)~1641(인조19), 조선조 제15대 군주. 재위 15(1608~1623). 제주에 유배된 임금.

광해군의 이름은 이혼李琿, 선조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 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1592(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했고,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됐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을 확보했으며,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慶熙宮, 1612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했다.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했다.

,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 노력해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 ‘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를 설치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임금이 제주에 온 것은 비록 유배 생활이지만 오직 광해군에 한한다.

1637(인조15) 616일 폐주를 제주에 안치하기 위해 사중사事中使·별장·내관·도사都事·대전大殿별감·나인內人·서리書吏·나장羅將 등이 임금을 압송해 이날 어등포於等浦에서 일박했다.

 

구좌읍 행원 어등개에 있는 광해군 유배 기착지.
구좌읍 행원 어등개에 있는 광해군 유배 기착지.

이때 호송 경호 책임 별장 이원로李元老가 이곳이 제주라고 알리자 어째서 이곳에­­­­­”라 하며 매우 놀래었다고 전한다. 또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알고 계시지요하니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이곳 가시 울타리 안에 나인內人 2명이 들어가서 심부름하게 하고 문을 닫아 잠근 후 도사 등 5명은 서울로 돌아가고 속오군束伍軍 30명을 남게 하여 번갈아 당직에 임하도록 했다.

1641(인조19) 71일 오후 나인의 말에 의해 광해군이 중병으로 신음한다는 말이 전해졌다. 같은 해 7월 초하루에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인조가 이 소식을 듣고 3일이나 조회를 폐지하였다고 전한다.

727일 호상護喪 일로 예조참의·정랑·중사·별감·서리 등이 별도포別刀浦로 들어와 다음 날 안치소로 가서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고 정랑正郞이 명정銘旌 글씨를 썼다.

새로 옷을 입히고 관을 덮고 관덕정으로 빈소殯所를 옮겨 대제大祭를 하고 목사에 의해 삼읍으로 돌면서 거행하고 상여는 삼읍에서 차출된 자에 의해 옮겨져 동년 8월 초 5일 포구에 다달아 816일 출발 후 돌아와 818일 출항했다.

이때 왕명에 의해 예조참의 채유후蔡裕後가 내도, 광해군의 시신을 호송하는 책임을 맡아 이를 옮겼다.

한편 광해군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혼란무도昏亂無道·실정백출失政百出이란 죄목으로 인목대비의 명령에 따라 폐위되었다. 강화도의 교동喬洞으로 유배되고 또 제주로 이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