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정성들여 돌 다듬어 483년간 지하의 체백 보호하다
(98)정성들여 돌 다듬어 483년간 지하의 체백 보호하다
  • 제주신보
  • 승인 2018.1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양홍씨 문중, 홍효손 무덤 이장 때 석곽 ·백자 등 발견
조선초기 제주지역 무덤양식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남양홍씨 문중에서는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홍효손 부부 무덤의 석곽을 재현해 놓았다.
남양홍씨 문중에서는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홍효손 부부 무덤의 석곽을 재현해 놓았다.

남양홍씨 홍효손

홍윤강이 제주도를 떠난 후 그의 행적은 물론 그의 무덤이나 또 섬에 남겨진 그의 후손들 인 아들 천보(天寶), 손자 명도(明道), 증손 처의(處義), 처지(處智) 형제까지 입도 4세의 무덤들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남양 홍씨 집안의 가장 오래된 무덤이라면 입도 5세인 홍효손의 무덤이다.

홍효손의 아버지는 홍처의(洪處義), 할아버지는 홍명도(洪明道)이다. 어머니는 진주 강씨로 슬하에 4남을 낳았고 홍효손은 그 셋째 아들이다.

홍효손의 부인은 숙인(淑人) 제주 고씨로 고수로(高壽老)의 딸이다.

홍효손의 벼슬은 세보에는 어모장군행충무위부사직(禦侮將軍行忠武衛副司直)으로 돼 있다.

홍효손의 생년은 모르지만 남양홍씨 세보(世譜)에 의하면 몰년은 가정(嘉靖) 13(1535)이라고 한다, 무덤은 와흘리 근사악 서남 기슭에 있었으나 20175월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했다.

홍효손은 2남으로 장남이 우치(禹治)이고, 차남이 우공(禹功)이다. 장남 홍우치는 몰 연대가 가정 20(1542)이니 아버지 홍효손이 서거한 지 7년 차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홍효손의 안장지는 근사악의 평지 위 작은 동산 위에 부부 쌍묘로 조성돼 있었다. 산담은 규모가 크고 좌향이 병좌(丙坐)로 북쪽을 향하고 있다. 산담 정면으로 영혼이 다니는 계단을 만들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산담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뭇돌로 곡선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쌓았다.

산담 안은 온통 억새가 우거져 있어 주인 떠난 스산함이 감돌고 있었다.

1900년에 후손들이 세운 홍효손의 비석을 보면, 비양에 어모장군유향좌수 남양홍공효손 의인 탐라고씨부좌지묘(禦侮將軍留鄕座首 南陽洪公 宜人 耽羅高氏祔左之墓), 비음에 광무 4(光武 四年, 1900) 10월에 13대손 가의대부행현감 재진(嘉義大夫行縣監 在晉), 통훈대부행현감재심(通訓大夫行縣 監在深), 14대손 훈장 종익(訓長 鐘翼), 15대손 좌수 성훈(座首 聖勛)등 개수(改竪) 했고 말각형(또는 圭形) 비석을 조면암으로 만들었다.

홍효손의 무덤 석곽

홍효손의 무덤은 20175월 이장할 당시 석곽이 발견됐는데 16세기 제주도 묘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남양홍씨 문중에서 근사악의 홍효손 부부 무덤을 이장할 당시 석곽이 발견되었는데, 묘혈의 깊이가 2m 정도였고, 석곽은 2줄로 현무암 석판을 세워 만들었다고 한다.

()에는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온통 숯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부인의 무덤에서는 두개골이 남아 있었고, 백자 사발 한 개를 찾아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석곽을 정식 발굴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남양홍씨 문중에서는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홍효손 부부의 석곽을 2018년에 나름 공들여 재현해 놓았다.

우리가 무덤 속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483년 동안 무덤 속에 있었던 석곽을 말이다.

이 석곽은 매우 정성을 들여 돌을 다듬었다. 현무암으로 다듬은 판석을 직사각형으로 좌우 각각 2~4개의 판으로 세우고, 앞뒤로 각 하나의 판석으로 마감했다.

석판은 각 7개의 판석으로 덮었다. 우측 석곽의 너비는 96, 길이 280, 높이 35이고, 돌이 두께는 24이다.

좌측 석곽의 너비는 82, 길이는 289, 높이 21이고 석곽의 두께는 35이다. 특이한 것은 바닥에 석곽을 보호하기 위해 석곽 주변 바닥에 평평하게 다듬은 판석 좌우 3개씩 , 앞뒤 1개씩 판석을 깔아놓았고 혹시 빗물이 광으로 스며들지 않을까 바닥 판석에 턱을 만들어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했다.

 

제주 화강석 문인석 중 가장 오래된 홍효손 석상.
제주 화강석 문인석 중 가장 오래된 홍효손 석상.

현존 제주지역 화강석 문인석 중 가장 오래 돼

홍효손 무덤에 전해오는 문인석은 2기다. 제주도에서 어렵게 볼 수 있는 화강석 재료로 만들었다.

화강석은 흰빛이 나고 입자가 자잘해 육지에서 무덤 석물을 만드는 주재료이지만 제주도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는 석재이기 때문에 이 화강석 석물이라면 육지에서 배를 타고 온 것들이다.

제주에 화강석 문인석이 보이는 무덤은 김보의 무덤, 부세영의 부인 양천 허씨 무덤, 고이지 무덤, 홍효손, 홍효손의 큰 아들 홍우치의 문인석 등이 있고, 제주 고씨 집안의 육지에서 이장해 온 무덤 등에서 보일 뿐이다.

그 외의 문인석들은 제주에서 구할 수 있는 조면암, 현무암, 송이석으로 만든 문인석이 대부분이다.

이 홍효손의 문인석은 현재까지 볼 수 있는 화강석 문인석 중 가장 오래된 편년[가정(嘉靖)·13(1535)]에 속한다.

홍효손의 문인석 크기는 좌측이 높이 114, 너비 37, 두께 29이고, 우측 문인석이 높이 113, 너비 34, 두께 29이다.

모자는 복두에 공복을 입었고 큰 홀을 들고 있는 모습이고 수 백년 세월에 복두 부분과 좌측 문인석의 심하게 훼손됐다.

제주 조면암으로 만든 문인석은 김만일 무덤의 문인석이 1632년이니 현존 제일 오래된 문인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만일의 아버지 김이홍 무덤의 문인석 또한 김만일 문인석과 연대가 같지만 그것이 2004년 재도굴 되는 바람에 찾을 길이 없다.

제주 문인석과 동자석은 한 석공이 만들어서 이 둘의 상관관계를 동시에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또 돌의 채취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크기에 따라 문인석과 동자석의 석질을 각각 다르게 만드는 것도 제주 석상의 풍토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인석과 동자석을 만들 때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돌 채취가 원인이 되는 경우, 석상 완성 후 운반할 것을 염두에 둔 경우, 조면암 산지가 멀어 조면암의 확보가 어려운 경우가 각각 다르다.

먼저 돌 채취가 어려운 경우를 보면, 먼저 문인석을 만들어야 하는 돌이 큰 돌이기 때문에 어떤 석질이라도 먼저 큰돌이 확보되면 문인석의 몫이 된다.

그러니까 큰돌이 현무암이면 현무암 문인석이 되고, 큰돌이 조면암이면 조면암 문인석이 되는 것이다.

동자석은 크기가 작기 때문에 먼저 문인석을 만드는 돌이 결정되면 문인석과 같은 돌로 만들게 된다. 동자석은 크기가 작아 돌의 확보가 쉽다.

그러니까 문인석의 돌 확보가 되면 동자석의 석질도 결정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석상을 운반할 것을 생각한 경우이다. 조선시대는 도로 사정이 너무 나빠 문인석을 운반하기란 엄청난 노동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그래서 무덤이 멀리 있는 경우, 석상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현무암이나 조면암보다 훨씬 가벼운 송이석을 사용하고, 또 망주석은 길어서 앙연 부분과 몸체 부분, 좌대 부분을 조립할 있게 만든다. 이렇게 문인석부터 동자석, 망주석 일체를 가벼운 송이석으로 만들게 된다.

세 번째로 조면암의 확보가 어려운 경우를 들 수 있다. 대정현 지역이나 정의현 지역에서는 조면암 산지가 있어서 조면암 확보가 쉽지만 제주목 지역에서는 조면암 확보가 쉽지 않다. 특히 한라산 산북 지역인 경우 조면암 산지와 워낙 멀어 조면암이 있더라도 운반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무덤 석물도 제각각 석질이 다르게 된다. 조면암의 확보가 어려우면 가장 먼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비석이다. 비석은 자신의 조상을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조면암을 구해서 비석을 만든다.

나머지 석물들은 구할 수 있는 대로 상석은 송이석, 동자석과 문인석은 현무암으로 만들어도 무방하다.

물론 석물을 모두 조면암으로 구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지만 부자가 아니면 조면암 석물 일체를 갖출 수가 없다. 그래서 제주도 문인석과 동자석들이 흔한 현무암 석질이 많은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