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을이
다시 가을이
  • 제주신보
  • 승인 20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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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녀 수필가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돈다. 어느새 알아차린 잠자리들도 마당으로 날아들며 선회하느라 바쁘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귀환하는 계절의 냄새를 맡는다.

참으로 긴 여름이었다. 에어컨의 냉기도 거대한 열기에 갇히며 무력한 날들만 이어졌다. 생활리듬에 금이 가면서 우울감이 깊어지고 머릿속이 하얗던 어느 날 불쑥 그림 하나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깊은 의식 속에 잠자던 기억 하나, 백열전등 아래 모여 있던 아이들이 얼핏 떠오른 거다.

오늘은 그곳을 찾아보고 싶었다. 해거름 녘에 집을 나서자 아직 남아있는 낮더위가 온 몸으로 스며든다. 광양로터리를 지나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니 빽빽이 들어찬 상가 건물들만 낯선 풍경으로 들어오며 옛 모습은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다. 걸음을 늦추고 옛 기억을 더듬으며 이리저리 가늠해 본다. 아마 이쯤이었을 게다.

오래 전 어느 날, 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당시 나는 퇴근 후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쯤이면 이리저리 산책하기를 즐겼다. 서늘한 밤공기 너머 동쪽하늘에 초승달이 떠오르고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별빛들의 떨림이 좋았다. 그렇게 걷다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였다. 학생들 앞에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고민도 깊어지던 초임교사 시절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집을 나선 터였다. 광양로터리를 지나 어느 골목으로, 관성대로 움직이던 그때 나를 멈추게 하는 무엇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창고 같은 허름한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마치 홀린 듯 그 불빛을 따라가고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 빛이 나오는 유리창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니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백열전등에 비친 표정들이 사뭇 진지하였다. 낯선 광경에 왠지 바로 돌아서지 못해 잠시 서 있다가 옆문을 밀고 들어갔더니 나이 지긋한 분이 친절히 맞아주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이 공부하는 야간학교였다. 직장에서 퇴근한 자원교사들이 검정고시를 준비시키는 곳. 대화를 나누던 중에 ‘중학교에 못 간’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마치 나만 누리며 산 것 같아 부끄럽고 미안한 거였다. 황송 쩍은 내 마음이 어느 새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의무감으로 더 앞섰을 게다. 내 전공과목이 마침 교사가 없어 비어있던 중이었다.

퇴근 후 내 발걸음이 바빠졌다. 남의 집에서 일을 하던 여자아이는 수줍음이 많았고, 공장에서 일하다 달려오던 아이는 늘 기름이 묻은 초록색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수업료 미납으로 정규 중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온 아이는 노래를 참 잘 불렀다. 스물네 살 된 여학생은 늦었지만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귓속말을 해주었다.

교복을 입어보는 게 소망인 아이들, 학생 신분을 인정받지 못하고 버스요금도 할인받지 못하고 있었다. 재직하던 학교 졸업식이 끝나자 교복을 모았다. 아이들이 모두 교복을 입고 등교하자 여느 일반 중학생 못지않았다. 스물네 살 여학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래 전, 중학교에 의무교육이 시행되기 이전 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꿈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그곳엔 밤이슬이 눅진하게 내린 새벽길을 달려 나와 별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희원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는 어린 시지프들이.

그렇게 지내기를 몇 해, 조는 아이를 흔들어 깨우는 일도 허다하였으나 수업시간은 늘 진지하였다. 지치고 흔들릴 때도 많았지만 아이들이 주는 기쁨의 눈빛이 늘 위로가 되었다. 그곳은 나에게 찾아온 뜻밖의 선물이었다.

눈을 감으면 당시 나를 이끌던 불빛이 아직도 선연하다. 하필이면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나를 멈추게 하던 그 빛….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날들. 누구에게나 후회하지 않는 삶이 있으랴만 지나온 길 한 모퉁이에서 아슴푸레한 기억을 떠올린다. 내 안 깊숙이 머물러있던 아이들과 조우한 오늘, 설핏한 하늘 저 편에서 진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다시 가을이다. 이제 계절은 나날이 빛을 달리하겠지. 더디지 않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 가을엔 내 마음도 깊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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