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포교는 나의 사명”…푸른 눈의 신부 천주교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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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태, 제주판관·명월진 만호 지내
구대, 숙종 때 탐라 유격장군 승진
구레모토, 소설가…다수 작품 선봬
구마기, 탐라 왕자…오곡 종자 반입
구마슬, 학교 설립 등 여성교육 앞장
1901년 사진으로 프랑스 드망즈(안세화) 주교 일행이 전도를 위한 순방 중 고갯길에 멈춰 선 모습. 프랑스의 구마슬 신부는 1900년에 제주에 파견돼 신축민란으로 혼란스러운 제주도민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01년 사진으로 프랑스 드망즈(안세화) 주교 일행이 전도를 위한 순방 중 고갯길에 멈춰 선 모습. 프랑스의 구마슬 신부는 1900년에 제주에 파견돼 신축민란으로 혼란스러운 제주도민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구광태具光泰1713(숙종39)~?, 문신. 영조 때의 제주판관.

자는 계통季通이고 본관은 능성이며 만리萬理의 아들이다. 1759(영조35) 문과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1762(영조 38) 3, 한유추韓有樞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644월에 떠났다.

176310월 심내복沈來復의 모역사건으로 제주 민심이 흉흉하자 영조 임금이 탐라 군민을 위유하는 글을 지어 이수봉李壽鳳에게 주어 제주로 파견했다.

1764년에는 봄 이수봉의 계청에 의해 명월진 만호로 승격했다.

구대具代고려 숙종 때 탐라의 유격장군遊擊將軍. 1101(숙종6) 10, 새로운 성주가 취임하자 고려 조정에는 배융부위陪戎副尉 구대具代를 유격장군으로 승진시켰다. 1개월 뒤 탐라에서는 그 답례로써 사신을 개경에 보내었다.

구레모토-아츠히코재일교포 작가, ‘구레모토-아츠히코吳本篤彦는 일본 이름이다. 이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41년 국민총력연맹 문화부의 문화 익찬翼贊 현상소설에 귀착지歸着地가 입선한 것이다.

두 번째의 일본어 작품 일향의 집이 조선문인협회 모집 현상소설의 예선을 통과하고, 이어서 사법 보호소설 한춘寒椿과 저축선전 극 각본 파도를 발표했다.

그 후 국민문학1943년에 신인 추천 제도를 시행한 기회에 그는 소설 긍지를 투고했고 동지同誌에 발표됐다.

국민문학에 발표된 구레모토吳本의 소설은 4, 에세이 2편이 있다.

소설 긍지矜持’ 19439월호. 소설 기반羈絆’ 194311월호, 소설 휴월虧月’ 19444월호, 소설 ’ 19449월호, 에세이 국민문학과 나-나의 도순道順’ 19445월호, 에세이 나의 주제-욕의浴衣의 도랑’ 19449월호이다.

김영화 교수는 일제강점기의 제주문학에서 구레모토-아쓰히코<吳本篤彦>의 경우도 제주 사람인지 아닐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데, 구레모토<吳本>는 아마도 제주시 출신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에세이 나의 도순에서 나는 내선內鮮의 인연 깊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까운 시기에 귀향해 어릴 때부터 공연히 향수를 이어준 삼성혈三姓穴에 신운神韻을 찾아(이하 생략)”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는 데에 익숙한 구레모토<吳本>이지만 그의 작품 긍지矜持를 보면 일본어에서 기묘한 표현이나 침착하지 못한 어구가 여기저기서 산견돼 역시 무리를 하며 일본어로 쓰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구레모토吳本국민문학지 이외에도 소설 해녀’(‘흥아문화·1944), 소설 쌍엽’(‘신여성·1944), 소설 갯가 멀리’(‘국민총력·1944), 소설 금선’(‘흥아문화·1945) 등을 발표했다.

국민문학194111월에서 19455월까지 서울 인문사人文社에서 발간된 월간 문학잡지이다.

구마기久麻伎생몰년 미상, 신라 문무왕 때의 탐라의 왕자. 일명 구마예久麻藝. 669(신라 문무왕9) 3,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덴지천황<天智天皇>으로부터 오곡의 종자를 얻어왔다.

673(문무왕13) 도라우마都羅宇麻 등과 함께 도일, 덴무천황<天武天皇>의 즉위식에 참가했다.

676(문무왕16) 탐라국의 조사調使로 또다시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로 보아 일찍부터 일본과 교역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구마슬具瑪瑟1871~1929,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神父. 한말의 선교사. 한국명으로 구마슬具瑪瑟 신부, 본명은 마르셀 라쿠르(P. Marcal Lacrouts).

신부는 187158일 프랑스의 바욘느(Bayonne) 교구의 보르드(Bordes)라는 곳에서 태어나 1890916일에 파리 외방外邦전교회에 들어갔다.

사제로 서품되면서 1894829일 한국 선교를 위해 출발, 한국에 도착하자 민(Mutel) 주교는 구 신부를 전라도에서 5년을 보내게 했다.

구마슬 신부는 심산유곡에 성당을 짓기보다는 넓은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래서 수류水流에 있는 전주 이진사李進士의 재실齋室을 매입해 1896년 그 집을 본당으로 개조했다.

후일 구 신부는 후일 전동殿洞성당 제2대 담당신부로서 전주에 성심여학교와 해성海星 여학교를 개설했다.

1900년에 그는 한국인 신부 김원영과 동행해 제주도에 파견됐다.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구마슬 신부가 19006월 당시 페네(Peynet裵嘉祿) 신부의 후임으로 제주도로 들어왔다고 기록됐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는 15만 명쯤이고 구 신부는 제주 성내와 산남 서홍리에 천주교 선교 본부를 설치, 각 촌락에 공소를 배치해 선교에 진력한 결과 천주교 신자가 많아졌다.

1901(광무5) 2월 그는 교섭 끝에 유배인 이범주李範疇를 석방시켰다.

동년 4월 신축민란이 일어나고 동 5월에 구신부는 서울에 피정避靜을 가고 없었다.

피정을 마치고 뭇세(Mousset文濟萬) 신부와 함께 이 섬에 들어왔을 때는 온 섬이 난리로 뒤집히고 제주성은 포위된 상태였다.

관덕정 광장에서 많은 신도들이 학살되고 프랑스 군함이 도착해 그들을 구했다. 구 신부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전교를 용기로써 확산시켰다.

구 신부는 1909년 신성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서울 성바오로수녀회의 김아나다시와 이공사가 등 두 수녀가 부임해 여성 교육이 활발해지면서 그는 여성 교육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1914년 구 신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활동할 수 없게 되어 19156월 전주全州로 가서 선교 업무를 계속했으며 1929811일 사망해 전주에 묻혔다.

 

전북 전주에 있는 구마슬(具瑪瑟) 신부의 묘. 구 신부는 1915년 전주로 가서 선교 업무를 계속했다.
전북 전주에 있는 구마슬(具瑪瑟) 신부의 묘. 구 신부는 1915년 전주로 가서 선교 업무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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