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 숙종 때 탐라 유격장군 승진
구레모토, 소설가…다수 작품 선봬
구마기, 탐라 왕자…오곡 종자 반입
구마슬, 학교 설립 등 여성교육 앞장
▲구광태具光泰:1713(숙종39)~?, 문신. 영조 때의 제주판관.
자는 계통季通이고 본관은 능성이며 만리萬理의 아들이다. 1759년(영조35) 문과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1762년(영조 38) 3월, 한유추韓有樞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64년 4월에 떠났다.
1763년 10월 심내복沈來復의 모역사건으로 제주 민심이 흉흉하자 영조 임금이 ‘탐라 군민을 위유하는 글’을 지어 이수봉李壽鳳에게 주어 제주로 파견했다.
1764년에는 봄 이수봉의 계청에 의해 명월진 만호로 승격했다.
▲구대具代:고려 숙종 때 탐라의 유격장군遊擊將軍. 1101년(숙종6) 10월, 새로운 성주가 취임하자 고려 조정에는 배융부위陪戎副尉 구대具代를 유격장군으로 승진시켰다. 1개월 뒤 탐라에서는 그 답례로써 사신을 개경에 보내었다.
▲구레모토-아츠히코:재일교포 작가, ‘구레모토-아츠히코吳本篤彦’는 일본 이름이다. 이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41년 국민총력연맹 문화부의 문화 익찬翼贊 현상소설에 ‘귀착지歸着地’가 입선한 것이다.
두 번째의 일본어 작품 ‘일향의 집’이 조선문인협회 모집 현상소설의 예선을 통과하고, 이어서 사법 보호소설 ‘한춘寒椿’과 저축선전 극 각본 ‘파도’를 발표했다.
그 후 ‘국민문학’이 1943년에 신인 추천 제도를 시행한 기회에 그는 소설 ‘긍지’를 투고했고 동지同誌에 발표됐다.
‘국민문학’에 발표된 구레모토吳本의 소설은 4편, 에세이 2편이 있다.
소설 ‘긍지矜持’ 1943년 9월호. 소설 ‘기반羈絆’ 1943년 11월호, 소설 ‘휴월虧月’ 1944년 4월호, 소설 ‘애厓’ 1944년 9월호, 에세이 ‘국민문학과 나-나의 도순道順’ 1944년 5월호, 에세이 ‘나의 주제-욕의浴衣의 도랑’ 1944년 9월호이다.
김영화 교수는 ‘일제강점기의 제주문학’에서 “구레모토-아쓰히코<吳本篤彦>의 경우도 제주 사람인지 아닐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데, 구레모토<吳本>는 아마도 제주시 출신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에세이 ‘나의 도순’에서 “나는 내선內鮮의 인연 깊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까운 시기에 귀향해 어릴 때부터 공연히 향수를 이어준 삼성혈三姓穴에 신운神韻을 찾아(이하 생략)”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는 데에 익숙한 구레모토<吳本>이지만 그의 작품 ‘긍지矜持’를 보면 일본어에서 기묘한 표현이나 침착하지 못한 어구가 여기저기서 산견돼 역시 무리를 하며 일본어로 쓰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구레모토吳本는 ‘국민문학’지 이외에도 소설 ‘해녀’(‘흥아문화’지·1944), 소설 ‘쌍엽’(‘신여성’지·1944), 소설 ‘갯가 멀리’(‘국민총력’지·1944), 소설 ‘금선’(‘흥아문화’지·1945) 등을 발표했다.
※‘국민문학’지誌는 1941년 11월에서 1945년 5월까지 서울 인문사人文社에서 발간된 월간 문학잡지이다.
▲구마기久麻伎:생몰년 미상, 신라 문무왕 때의 탐라의 왕자. 일명 구마예久麻藝. 669년(신라 문무왕9) 3월,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덴지천황<天智天皇>으로부터 오곡의 종자를 얻어왔다.
673년(문무왕13) 도라우마都羅宇麻 등과 함께 도일, 덴무천황<天武天皇>의 즉위식에 참가했다.
676년(문무왕16) 탐라국의 조사調使로 또다시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로 보아 일찍부터 일본과 교역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구마슬具瑪瑟:1871~1929,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神父. 한말의 선교사. 한국명으로 구마슬具瑪瑟 신부, 본명은 마르셀 라쿠르(P. Marcal Lacrouts).
구具 신부는 1871년 5월 8일 프랑스의 바욘느(Bayonne) 교구의 보르드(Bordes)라는 곳에서 태어나 1890년 9월 16일에 파리 외방外邦전교회에 들어갔다.
사제로 서품되면서 1894년 8월 29일 한국 선교를 위해 출발, 한국에 도착하자 민閔(Mutel) 주교는 구 신부를 전라도에서 5년을 보내게 했다.
구마슬 신부는 심산유곡에 성당을 짓기보다는 넓은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래서 수류水流에 있는 전주 이진사李進士의 재실齋室을 매입해 1896년 그 집을 본당으로 개조했다.
후일 구 신부는 후일 전동殿洞성당 제2대 담당신부로서 전주에 성심여학교와 해성海星 여학교를 개설했다.
1900년에 그는 한국인 신부 김원영과 동행해 제주도에 파견됐다.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구마슬 신부가 1900년 6월 당시 페네(Peynet:裵嘉祿) 신부의 후임으로 제주도로 들어왔다고 기록됐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는 15만 명쯤이고 구 신부는 제주 성내와 산남 서홍리에 천주교 선교 본부를 설치, 각 촌락에 공소를 배치해 선교에 진력한 결과 천주교 신자가 많아졌다.
1901년(광무5) 2월 그는 교섭 끝에 유배인 이범주李範疇를 석방시켰다.
동년 4월 신축민란이 일어나고 동 5월에 구신부는 서울에 피정避靜을 가고 없었다.
피정을 마치고 뭇세(Mousset:文濟萬) 신부와 함께 이 섬에 들어왔을 때는 온 섬이 난리로 뒤집히고 제주성은 포위된 상태였다.
관덕정 광장에서 많은 신도들이 학살되고 프랑스 군함이 도착해 그들을 구했다. 구 신부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전교를 용기로써 확산시켰다.
구 신부는 1909년 신성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서울 성聖바오로수녀회의 김金아나다시와 이李공사가 등 두 수녀가 부임해 여성 교육이 활발해지면서 그는 여성 교육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1914년 구 신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활동할 수 없게 되어 1915년 6월 전주全州로 가서 선교 업무를 계속했으며 1929년 8월 11일 사망해 전주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