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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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누렇게 사위어 가는 오름 능선으로 노을이 불을 지른다. 황금빛으로 활활 타오르며 바람을 탄 억새의 춤사위가 한바탕 흥을 돋운다. 가을이 저리 아름답게 저물어 가는데, 내 황혼도 저 노을처럼 고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 잠겨 걷는다.

오솔길에 접어들어 찬 기운에 옷깃을 여민다.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없이 감사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듯하게, 너그러이 품어 안는 기도의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결실의 계절 앞에서 간절해지는,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를 위한 기도에서 가족,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이웃에게 무언의 울림으로 전해졌으면 한다. 마음이 지극하면 멀리 있어도 영감으로 통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옆으로 눈을 돌려 병상에 누워 있는 몸이 불편한 이, 가슴 조이며 첫 시험에 도전하는 수능을 앞둔 수험생, 치열하게 일자리를 구하고자 애쓰는 젊은이들에게도 마음으로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올해가 가기 전에 그들에게 화려하거나 풍요로운 삶이 아니어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의미를 찾게 된다면 하는 바람이다.

올여름 지독한 가뭄과 더위에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함을 겪었다. 사람처럼 인내와 고통을 겪은 곡식이며 과일, 내 길 위의 친구들인 보랏빛 쑥부쟁이와 참으아리, 작은 얼굴의 풀꽃들이 씨를 거둘 때다. 이들에게 하루라도 더 은혜로운 햇빛이 내리길 소망한다.

내겐 특별한 종교가 없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가슴속에는 저마다 의지하는 절대자 하나쯤 품고 산다. 그건 살아가는 데 지극히 필요한 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세상을 떠난 조상님이 될 수 있겠고, 심신이 돈독한 신자는 종교에 의지하며 위안을 받으리라.

소소한 것에 기대는 작은 바람, 때로는 그게 더 절실하다. 가볍게 여겼는데 끈질기게 괴롭히던 병마와의 동행,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이 발목을 잡았다. 숨 가쁘게 부린 심신을 위해 잠시 쉬라는 경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이 들면 한 번쯤 겪어야 할 치레거니 하며. 아픈 만큼 한층 성숙한 내가 되길 빌었다.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시달리던 신경 줄이 이젠 꽤 무디어졌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삶에 대한 반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득하게 느껴졌던 내 인생의 가을이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우쭐대며 오만하게 살지는 않았는가. 알 수 없는 절대자가 일부러 내려주신 깨우침이라 여기며,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이 됐다. 아픔과의 동거가 헛되지 않게 그동안 켜켜이 쌓였을, 몸 안의 독소가 사라지고 맑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길 원하며.

태풍이 휩쓸고 간 소나무 숲에 이른다. 부러진 가지를 매달고 수척했던 게 옛 모습으로 회복되고 있다. 모진 바람에 찢겨 남루한 잎을 달고 있던 단풍나무는 우듬지에 붉은 새잎을 피웠다. 무심히 바라볼 수 없었던 치유의 안간힘,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다.

언덕배기 누렇게 시들은 호박넝쿨 줄기 끝에, 빛바랜 늦둥이 호박꽃 한 송이 철없이 피었다. 벌도 찾지 않을 늦가을인데 열매를 달 수 있으려나. 조급해 측은해 보이는 꽃에 내리는 햇살이 한 줌은 줄었다. 햇살 한 자락에 내 기도를 함께 얹어주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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