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오라리 방화사건‘제주도의 메이데이’…학살의 전주곡이 시작되다
(18)오라리 방화사건‘제주도의 메이데이’…학살의 전주곡이 시작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4월 27일 김익렬 9연대장, 김달삼에 평화협상 제안
4·28 평화협상 합의 사흘만인 5월 1일 사건 발생
우익청년 단원 30여 명, 5세대 12채 민가 불태워
미군 촬영반 무성영화 촬영, 유일한 영상기록 남아

오라리(연미마을) 방화사건은 제주 4·3 당시 큰 사건 중 하나이다.

4·28 평화협상 사흘만인 51일 벌어진 이 사건은 협상이 파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학살을 점화시킨 역사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19485112시경 서북청년회 등의 극우청년 30여 명이 오라리 연미마을에 들어와 10여 채의 집에 불을 놓음으로써 시작됐다.

불길에 휩싸인 연미마을

194843일 제주4·3이 발발했다. 이에 당혹한 미군정은 427일 경비대의 진압작전 투입을 결정했지만 당시 9연대장 김익렬은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그리고 양측은 428‘72시간 이내에 전투를 완전히 종결하고, 무장해제는 점진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는 협상안에 합의하는 등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지만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오라리에서는 4·3무장봉기 이래 무장대와 경찰로부터 희생자가 발생했다.

방화 사건은 51일 벌어졌다. 전날 무장대에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이 열렸다.

마을 부근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경찰 4명 가량과 서청·대청 단원 30여 명이 참여했다.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자 트럭은 경찰관만을 태운 채 돌아갔고 청년단원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중에는 오라리 출신 대청 단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오라리 마을에 진입하면서 좌파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5세대 1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이날 오후 서청대청 단원들로부터 무장대 출현 소식을 접한 경찰기동대가 2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오라리 마을로 출동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장대는 이미 마을을 떠났고 주민들은 불이 붙은 집을 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마을 어귀에서부터 총을 쏘며 진격해오자 주민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산 쪽으로 도주했다.

당시 주민들은 비행기가 오랫동안 상공을 비행했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경비대 지프와 트럭이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이어진 조사

평화협상 당사자인 김익렬 연대장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모슬포에서 달려와 현장 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경찰의 후원 아래 서청?대청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자행한 방화라고 판단, 미군정을 찾아가 이를 보고했으나 묵살 당했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무장대의 행위라는 것이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포기하지 않고 오라리 사건의 조사를 계속해 다음 날인 52일 오라리 주민들이 방화 주동자로 지목한 이 마을 출신 대청 단원 A씨를 제주읍내에서 검거해 모슬포 영내에 구금 조치했다.

하지만 A씨는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 후 신임 박진경 연대장에 의해 곧 풀려나 경찰에 투신했다.

이는 경비대원들의 불만을 샀고, 후에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들이 재판정에서 박 연대장의 과오를 지적할 때 그중의 하나로 언급되기도 했다.

기록으로 남은 사건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 촬영반에 의해 촬영됐다. 미군 비행기에 의해 불타는 오라리 마을이 공중에서 찍혔다. 지상에서는 오라리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의 모습이 함께 촬영됐다.

이 무성영화의 필름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돼 있는데 제주4?3사건의 초기 상황을 다룬 유일한 영상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필름의 제목은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로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에도 그 내용이 소개돼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참혹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차마 말씀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살아오셨습니다.”

4·3 당시 임시 수용소였던 주정공장에서 태어난 송승문씨(69)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오라리 방화사건을 겪었다.

송씨는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셨을 때 모진 고문을 당하셨다할머니가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시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청년단으로부터 폭행·폭언 겁탈 당하는 등 지역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옷을 다 벗기고 운동장을 뛰게 하는 등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기도 했다.

송씨는 주민들은 야산으로 피신생활을 하거나 해변마을로 이주해야 했다. 어머니도 산속으로 피신하셨다이웃마을로 피신했던 이들은 그곳에서 도피자 가족이라고 희생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할 정도로 할머니와 어머님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살아오셨다당시 이야기를 꺼내면 참혹했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에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또 혹여나 자식들이 피해를 볼까 봐 피해사실을 감추며 살아왔다고 밝혔다.

송씨는 억울하게 희생당하신 분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내가 태어날 때 주정공장에서 도움을 준 분들을 꼭 찾고 싶다. 항상 마음의 빚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한번 만나서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