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뜨락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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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진 동화작가

시월은 맹동이라 입동 소설 절기로다/나뭇잎 떨어지고 고니 소리 높이 난다/무우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사람의 자식 되어 부모 은혜 모를 소냐/의복 음식 잠자리를 각별히 살펴 드려/행여나 병나실까 밤낮으로 잊지 마소.’

농가월령가 시월령의 일부분이다. 일 년 동안 해야 할 일과 계절마다 알아두어야 할 세시풍속들을 노래하고 있어 조선시대 서민문화를 알 수 있는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농사일이 끝난 초겨울이라 입동과 소설을 대비하여 김장을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한 나뭇잎이 떨어져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니 부모 은혜를 잊지 말라고 일갈(一喝)한다.

시대가 변하고 세시풍속도 변했다. 하지만 농가월령가는 디지털시대인 지금도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온고이지신이라 했던가? 뭍 생명들 가을나기를 지켜보면서 실학자 정학유의 촌철살인 같은 지혜가 생각나기에 하는 말이다.

불잉걸을 쏟아 붇는 것 같은 폭염은 다 어디가고 내 뜨락에도 이제 가을이 가득하다. 하늘 높이 나는 고니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직박구리 부부가 가을을 만끽하며 뜨락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내 움직임이 부담스러웠을까? 이내 저공비행으로 스르르 자리를 뜬다. 은근히 그들을 방해한 것 같아 쑥스러워 진다. 담장 밑에 있는 까치 녀석은 미동도 않고 나를 주시한다. 녀석을 보며 불현 듯 어릴 적 울담 밑에서 볕바라기를 하고 있는 내 유년 모습이 떠오르는 건 또 어인일인가?

가뭄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던 녀석들이 힘겹게 가을을 나는 모습은 정말 눈물겹다. 여름에 발아하지 못한 샐비어가 작은 몸에 이제야 힘겹게 꽃등을 달았다. 곧 다가올 겨울을 의식한 듯 종자를 남기고 자연에 묻히려 종종거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곧 찬바람이 자신을 덮친다는 걸 실감했음이리라.

앵두나무는 가장 먼저 겨울을 준비하는 듯하다. 벌써 잎들을 뜨락에 다 내려놓고 우듬지를 곧추세웠다. 곧 들이닥칠 눈보라와 맞설 태세다. 가을이 한창인데도 불구하고 까만 열매를 하염없이 땅으로 떨어뜨리는 녀석도 있다. 까마중이다. 잎들은 찬바람에 기력을 잃었지만 더 많은 분신을 자연으로 내보내려는 왕성한 생식력이라니... 그래서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게 아닐까?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기는 뭍 생명들에게 인간들은 겸허히 고개를 숙여야 한다.

뜨락에서 몰아내려는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일까? 여름 한철 뽑아내다가 남은 털머위가 꽃대를 밀어 올렸다. 튼실하다. 노란 꽃망울을 달고 찬바람에 맞설 태세다. 끈질기게 소매를 붙잡는 녀석이라 이젠 식구로 받아들여야 할 듯 하다. 그늘에 있어 맥을 못추던 송엽국이 찬바람이 불어야 제 몸집을 키운다. 녀석은 봄에 꽃을 피워야 제격인데 이상한 일이다. 이상 기후에 놀란 생명들이 제 계절을 잊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상강도 지나고 이제 곧 입동(立冬)이다. 흰 눈이 우리 집 뜨락을 가득 매울 때 쯤 녀석들은 눈 속에서 새봄을 꿈꾸리라. 농가월령가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제 부모와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안부 전화 한 번으로도 부모님들은 더 없이 기뻐할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제 나도 겨울 채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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