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물의 혁명 주도한 ‘물 지사’…1100도로 건설
(60)물의 혁명 주도한 ‘물 지사’…1100도로 건설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병우, 흉년에 자비곡 99석 내놔
구영석, 정의현감…박사렴의 후임
구원조, 제주판관으로 최장기 재임
구의준, 경상병마절도사 등 지내
구자춘, 15대 제주도지사·국회의원
박정희 대통령이 구자춘 제주도지사, 양정규 국회의원 등과 함께 어승생 저수지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구지사는 어승생 댐 건설에 앞장서는 등 제주지역 물 문제 해결에 힘썼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박정희 대통령이 구자춘 제주도지사, 양정규 국회의원 등과 함께 어승생 저수지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구지사는 어승생 댐 건설에 앞장서는 등 제주지역 물 문제 해결에 힘썼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구병우具秉愚정의현감. 김종관金鍾輨의 후임으로 도임했다.

구병우는 1850(철종1) 의사 오흥태吳興泰를 제사하기 위해 정의서당 안에 의사묘義士廟를 건립했다.

1852(철종 3) 52, 작년 전도의 흉작으로 많은 이들이 굶주렸는데, 이전미 1500석과 내탕전 및 대미代米 136석 가운데 정의현감 구병우가 자비곡自備穀 99석을 보충해 진제賑濟에 도움을 주었다.

구병우는 목사 백희수白希洙의 지시로 18531월부터 동년 3월까지 관아 및 군기를 보수하기도 했다.

구영석具齡錫1771(영조47)~?, 문신. 정의현감. 충청도 해미海美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능성, 구형원具馨遠의 아들로 태어났다.

1812(순조12) 문과 토역전시討逆殿試에서 갑과로 급제, 1820(순조20) 6월 박사렴朴師濂의 후임으로 도임했다.

구영석은 18233월에 떠났으며 재임 중 유생을 권장했다.

구영석 의 시 산방산(山房山)’=石勢龍頭壓바위의 형세가 용의 머리를 누른 곳/ 禪居鳥夢空스님이 살아 새들은 잠잘 곳을 잃었네!/ 齋雲生瀉底내뿜는 물 밑으로 맑은 구름 솟아나고/ 靈液滴房中신령스런 물방울 방안에 뚝뚝 떨어진다.

구원조具源祚제주판관. 1858(철종9) 10, 구재린具載麟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했다.

그는 1863(철종14) 5, 강제검姜悌儉·김흥채金興采 등이 일으킨 임술난壬戌亂을 진압하지 못했다고 해서 파직되었다.

앞서 18602월 제주암행어사 심동신沈東臣이 서계해 목사 정우현鄭愚鉉·전 목사 임백능任百能·전 목사 목인길睦仁吉·채동건蔡東健·전 판관 구재린具載麟·대정 전 현감 김기휴金沂休 등의 죄상을 아뢰고 판관 구원조具源祚·대정 전 현감 강이진康履鎭·정의현감 강만식康萬植 등은 포상을 시행하고 승서陞敍하도록 했다.

한편 제주판관 구원조는 역대 판관으로서 최장기 재임기록을 남겼고 재임 중 6명의 목사가 교체되었다.

구의준具義俊무신. 제주목사. 경상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1655(효종6) 9, 목사 소동도蘇東道의 후임으로 부임하고 16584월에 떠났다.

구자춘具滋春1932(일제강점기)~1996, 정치가. 행정가. 15대 제주도지사. 국회의원.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多斯면 세천世川리에서 태어났다.

구자춘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06월 경북 성서초등학교 교사로 재임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동년 12월 포병소위로 임관.

1954년 미포병학교를 졸업, 동년 국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군사정부에서 내무관료로 발탁된 그는 충남도경 및 전남도경 국장을, 치안국 정보과장과 서울시 경찰국장을 거쳐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19682월 경찰전문학교장에서 제주도지사로 부임해 감귤 제주건설과 중산간 개발을 도정 목표로 정했고, 도정 방침으로 지역사회의 종합개발, 천연자원의 보호육성, 서정쇄신과 생활개선에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순시에 나서 남제주군 관내에서 1개 면이 10만 그루의 감귤나무를 심어 수익성을 올리는 영농방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구자춘은 재임기간 동안 어승생 댐 건설에 매달렸고, 이로 인해 구지사를 가르켜 물 지사라는 말이 나올 만큼 도정은 물 문제 해결에 집중시켰다.

19684월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미국 존슨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하와이 교민僑民들과의 만찬석상에서 제주를 극동의 하와이로 만들겠다.”고 피력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구지사를 청와대로 불러 연내에 어승생 댐공사를 완성시켜 놓으라고 벼락 지시를 내렸다.

이 한마디의 위력은 대단해서 14740만원에 불과하던 사업비에 이듬해 1969년에 투자할 계획이던 42000만원을 1968년 추경追更에 편입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지점을 통과하는 길인 1100도로는 구지사가 떠난 후 4년 만인 1973년에 노폭 10m, 포장 폭 7m2차선으로 총공사비 64000여 만원으로 완공됐다. 흔히 말하길 “5·16도로는 김영관의 길이고 1100도로는 구자춘의 길이다.”라고 했다.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故 구자춘 도지사 송덕비.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故 구자춘 도지사 송덕비.

구자춘은 동년 11월 우도(-)를 순시해 15톤급 도항선渡航船 건조비 450만원을 보조했고, 결국 도항선은 건조되어 다음 해 58일에 취항, 매일 우도-성산포간을 2회에 걸쳐 운항했다.

선명은 자연호滋演號라 명명, 이는 구자춘의 자자와 연평리演坪里의 연자를 따온 데서 연유한 명칭이다.

1969310일에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일주도로 181를 두 시간에 주파할 수 있도록 노폭 15~25m로 확장할 계획을 마련했다.

어승생 수자원개발공사의 통수식은 19691012일 산천단에서 거행됐다.

이는 제주도 개벽 이래 물의 혁명이란 상징물로 12만 명에게 생활용수 12000t과 농축용수 34000t을 공급하게 된다.

이날 통수식에는 구자춘 지사와 양정규 의원, 주민 5000여 명이 통수 관경에 환호성을 올렸다.

그는 1971년 제17대 경북지사를 역임하면서 행정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78년 재38대 내무부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10·26사태로 1년여 재임하고 내무장관직을 사임했다.

19876월 김종필金鍾泌과 함께 신당 창당에 나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신민주공화당 부총재, 경북지부위원장으로서 활동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1990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당무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자당民自黨 공천을 받아 재선되었다.

이후 1994년에는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신우회 2대 회장직을 수행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