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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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 수필가

어느 순간 산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 홀린 듯 집을 나선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창문을 여는데 여명 속에 푸르스름하게 솟은 한라산정이 눈에 들어왔다. 함께 갈 친구가 누가 있을까. 사전 약속 없이 이른 시간에 산으로 동행해 줄 친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서 훌쩍 길을 나섰다.

영실로 가는 길에는 지난 계절의 흔적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미처 돌아가지 못한 나뭇잎들은 갈색으로 남아 가을 끝자락을 붙들고 가벼이 떨고 있다. 등산로로 들어선다. 겨울을 준비하는 고즈넉한 숲길에 낙엽 밟는 소리가 낮게 퍼진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앞서가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걸어간다. 적송 숲이 여유롭게 맞이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올곧게 서 있는 나무 아래로는 조릿대 숲이 펼쳐져 바람이 일 때마다 초록 물결이 일렁이며 파도소리를 낸다. 나무 사이로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길. 걸음걸음 딛는 돌부리마저도 동행이 되어준다.

바위에 걸터앉는다. 하늘을 쳐다보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심호흡을 한다. 지난 날, 오로지 정상만을 고집하며 오르던 때는 느끼지 못하던 평온함이 나를 감싼다. 젊다는 건 도전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터인데 주변을 보지 못하고 앞만 바라보며 질주하던 시간. 무엇을 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며 오르고, 무엇을 얻으려고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돌아볼 새도 없이 올랐던지.

이십대 초반에 처음으로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직장에 다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때려치우며 저 혼자 아웃사이더인 척하던 그때, 겨울 초입이었다. 정상까지 가려면 용진각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야 하던 시절. 비상식량과 군인용 담요, 손전등과 초 등을 준비하고 배낭을 꾸렸다. 등반 선배인 언니에게 조언을 구해가며 나름 철저한 준비를 하고 나섰다.

지금처럼 정비되지 않은 날 것의 등산로는 험했다. 숨이 턱에 차고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오를수록 가파른 산길에서 무릎은 점점 구부려지고 배낭의 무게로 몸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포기하고 그만 내려가 버릴까. 수도 없이 갈등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기어이 올랐다. 이윽고 다다른 대피소는 돌로 지어진 창고 같은 집이었지만 안락한 느낌으로 받아주었다.

산중에서 맞는 밤은 깊고 아득했고 추웠다. 동물의 울음소리인지 숲속을 휘어 감는 바람 소리인지 까만 정적을 깨우며 가슴을 파고드는 소리에 잠은 오지 않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부르튼 발을 주무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다음날, 백록담 정상에 올라 난생처음 접하는 절경에 탄복하면서도 전날 밤을 달래주던 뜨거운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숱한 세월이 흘렀어도 그 밤을 흐르던 소리는 시간을 거슬러 나를 산으로 부른다. 외로움에 사무칠 때, 사는 게 시시해서 포기하고 싶을 때, 중요한 결정을 앞에 놓고 어쩌지 못해 절절맬 때 나는 산으로 간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이 결혼하기 전 일이다.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한 번 만나봐 달라며 연락이 왔다. 조촐한 찻집에서 마주한 자리, 쑥스러운 듯 웃는 얼굴이 선량해 보여서 우선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바라던 사윗감이 아니었다. 학벌이나 직장도 세속의 잣대로 재기에는 하잘것없었다. 못마땅한 속내를 감추고 헤어졌지만, 엄마의 입장과는 달리 좋은 점만 보이는 딸에게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 앞섰다.

며칠을 두고 고민하다 딸을 데리고 산으로 갔다. 눈발이 펄펄 날리던 그 날, 성판악 코스는 등산객들로 붐볐고 내 속마음과는 달리 딸은 들떠있었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오르고 올라 진달래밭에 당도했을 때, 이 전까지는 본 적이 없는 순백의 설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해발 1500m 고지에서 만나는 맑디맑은 천상의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전해오는 황홀한 떨림, 이런 순간이 행복이려니.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빨개진 양 볼을 비비며 미소 짓는 딸을 봤을 때, 난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험난한 산길을 오를 때도 저 혼자 꿋꿋이 걸어왔듯이 삶은 오로지 스스로 책임지고 가야할 길이라고.

고개를 들어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그때 산이 들려주는 소리에 마음을 닫았다면 지금의 소중한 것들이 내게로 왔을까.

언제나처럼 산을 오르다 보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점점 가벼워진다. 산길을 기어가는 한 마리 벌레처럼 온몸으로 산에 들 때, 내 영혼은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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