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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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바다를 옆에 끼고 굽이굽이 펼쳐진 애월 해안도로를 달린다.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카페들. 그 이름들을 머릿속에 담다가 뜻을 알 수 없는 외래어에 부딪치자 쫓기듯 우리말을 찾는다. 제주 담다, 지금 이 순간, 노을 이야기, 바람이 머무는 곳, 제주야 놀자…. 묘한 안도감이 찾아든다.

‘리사무소’라는 나무 명패가 동네에서 가장 큰 간판이었던 마을에 살았다. 제주시에 몇 번 가 봤는지가 자랑거리가 되었던 그 시절. 샛아버지 댁 제사는 일 년에 한 번 가는, 어떤 때는 동생에게 밀려 그 해를 건너뛴 적도 있는, 내가 시골에서 도시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버스 차창 밖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세상이었다.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달거나 옆구리에 이름표처럼 붙어 있는 건물의 간판들. 외우듯 읽었다. 우리 동네와 다른 생경한 풍경에 매료돼서가 아닌, 알은척하며 시내에 다녀왔다는 것을 생색내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기억조차 없는 그 이름들….

그때의 습관을 여태 갖고 있다.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어김없이 글자들을 눈에 넣는다. 그러다 입말이 문자화된 제주어, 또는 그곳의 이미지와 안성맞춤인 상호와 눈이 마주치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반면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거나 저속한 글자를 갖다 붙인 작명에는 쯧쯧거린다. 더욱이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간판에는 못마땅함이 오래간다.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 오른편에 3층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 지난봄까지 아기자기 꾸민 텃밭이었는데, 어느 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창가를 내다보니, 포클레인이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탁 트여 눈들 공간을 확보했던 곳에 갑자기 들어 선 꽉 막힌 갑갑함. 그보다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든 것은 1층의 용도였다. 입구 한쪽에 비스듬히 놓인 책받침만 한 검은색 대리석에 쓰인 ‘B’로 시작되는 흘림체. 곁들인 한글도 없어 그 글씨체로는 무엇을 할 가게인지 도통 가늠이 서지 않았다. 단어를 인터넷 검색했지만 철자가 틀렸는지 찾지 못했다. 나의 무지몽매함을 탓할 수밖에.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간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요즘이다. 새 친구를 향한 설렘보다 깃들여질 때까지 서먹함을 견뎌야 한다. 뜻을 알 수 있는 우리말이거나 한글로 표기되어 읽히는 외래어 혹은 외국어는 그나마 다행이다. 내 사무실 옆처럼 영어인지 불어인지 모를 꼬부랑글씨엔 공연히 부아가 치민다.

간판은 그곳의 첫인상이다. 첫인상은 소통의 시작이라 하지 않는가. 언제부터인가 간판은 제 역할을 회피하며, 뜻을 헤아릴 수 없거나 읽을 수조차 없는 글자들을 나열하고 있다. 시각을 통해 얻게 되는 언어는 멀찍이 있어도 무엇을 하는 곳인지 겉대중으로 짐작이 가야 한다. 언어 본연의 구실이다. 그게 제 몫이다.

겉멋만 도드라진 소품으로는 감성을 건드릴 수 없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가 활성화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너나없이 ‘불통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상대방이 귀를 닫게 하는 일방적인 소통 탓이 아닐까. 서로 간 뜻이 통해야 공감할 수 마음의 한자리를 내줄 수 있다.

‘B’로 시작하는 곳은 카페였다. 커튼 사이로 훔치듯 커피 잔을 든 사람들을 보았다. 그곳을 다녀왔다는 동료에게 상호를 물었더니 모르겠단다. 아무래도 궁금증에 목마른 내가 걸음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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