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토지결수가 적어 백성들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
(61)“토지결수가 적어 백성들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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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룡, 제주목사…요역·세금 감면 앞장
구재린, 제주판관·홍경섭 후임
구재영, 임백연 후임으로 도임
구제국, 민란 평정 계획…조정서 복호 내려
권경우, 도민 궁핍 대책 강구 요청
권극중, 대정현감…향교 이설 주역
제주시 화북동 3957번지에 있는 비석거리의 옛 모습. 비석이 흩어지고 내려앉은 광경이다. 현재 화북동비석거리에는 제주목사를 지냈던 구재룡의 거사비 등 13개의 비석이 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시 화북동 3957번지에 있는 비석거리의 옛 모습. 비석이 흩어지고 내려앉은 광경이다. 현재 화북동비석거리에는 제주목사를 지냈던 구재룡의 거사비 등 13개의 비석이 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구재룡具載龍무신. 제주목사. 전라우수사로 재임 중 1839(헌종5) 3, 이원달李源達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했다.

구재룡 목사는 통적미通籍米에 대한 폐단을 갖가지 지적했고, 이를 혁파하기 위해 1840년 자신의 늠전廩錢 500여 냥을 내놓아 호적을 닦을 때의 인구미人口米로 충당하게 했다.

또한 양읍兩邑(정의·대정)의 수세곽水稅藿과 본주의 일용곽日用藿을 폐지하게 했다.

이 해에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유배해 왔다.

18409월에 영국 군함 1척이 가파도에 내박, 우축牛畜을 약탈하므로 그는 남은 소를 모동장毛洞場으로 방출시켰다.

이에 영국 군함은 대포 세 알을 잇달아 쏘아 놓고 서쪽 방면으로 사라졌다. 이에 구재룡은 제주도 일대의 경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1841(헌종 7) 3월에 파직되었다.

비록 파직돼 떠났으나 요렴徭斂을 가볍게 부과하는 등 치정했으므로, 백성들은 애석하게 생각해 추사비追思碑를 세워 그를 기렸다.

목사 구재룡이 요역과 세금을 감면한 것에 대해 엄장면嚴莊面(애월면)에 의해 사상구공재룡휼민선정비使相具公載龍恤民善政碑가 세워졌다. 오늘날 자연사박물관 구내에 있다.

1841(헌종7)5월에는 사상구공재룡휼민선정비使相具公載龍恤民善政碑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서김녕리 비석거리에 남아 있고, 현재 화북동 비석거리에는 목사구공재룡거사비牧使具公載龍去思碑가 있다. 글 내용은 창명만리 한라천봉 뇌아명부 경첨중중(滄溟萬里 漢拏千峰 賴我明府 更添重重)”이라 했다.

구재린具載麟철종 때의 제주판관. 1857(철종8) 10, 홍경섭洪敬燮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5810월 이국인異國人에 대한 실정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서 파직됐다.

구재영具載榮 제주판관. 1852(철종3) 12, 임백연任百淵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5312월에 폄파貶罷됐다.

 

의사義士 구제국具濟國 묘비
의사義士 구제국具濟國 묘비

구제국具濟國1766(영조42)~1831(순조31), 의인義人. 일명 구제득具濟得, 자는 사빈士彬, 본관은 능주綾州이며 안덕면 사계리<거문->에서 구보만具普萬3남으로 태어났다.

진해현감 구보만이 대정현 상금물로上今勿路(현 사계)에서 유배 중 진주 강씨를 맞아 그를 낳았다.

1812(순조12)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민란을 일으키자 구제국이 주도해 양위경梁渭慶(화순), 송익하宋益河(덕수), 강상훈姜尙勛, 고한일高漢一, 박필기朴弼基 등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 출병하기로 하여 도내에 격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집하던 중 민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했다.

앞서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1817(순조17) 1월 구제국, 양위경 두 집안에 호역戶役과 요역徭役을 면제하게 하는 복호復戶가 내려지고 또 그가 사망한 후 1863(철종14) 12월 대정현 유생 이한복李漢復이 제주안핵겸찰리사 이건필李建弼에게 올린 글월에 의해 포양褒揚의 은전이 내려졌다. 구제국은 대변청待変廳 행수行首로 임명되기도 했다.

권경우權景祐문신. 제주경차관. 자는 자수子綏, 본관은 안동, 판관 권질權耋의 아들, 대사헌 권경희權景禧와 이조정랑 권경유權景裕의 형이다. 1470(성종1)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1478(성종9) 4월 경연에서 시독관侍讀官 권경우가 보고하기를 제주의 밭은 9080여 결餘結인데 인구는 9400여 명이니 도민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해 권신에게 구차하게 의부하지 않았으며, 직무를 공정히 다스려 많은 사람들이 감복했다.

중종반정으로 적몰가산이 환급되고 죄명도 신원되었다.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뒤에 예문관 봉교에 승진해 사관 선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듬해에는 천추사의 검찰관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통사通事 조종손趙宗孫 등의 밀무역을 검찰한 공로로 4계급 승진해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어 그는 홍문관 수찬으로 옮겨 제주경차관으로서 1477(성종8) 11월 하직하게 될 때 지참해 갈 사목事目첫째 제주 삼읍 백성이 경상·전라도의 연변에 옮겨가는 자가 많으니 수령과 관계관은 그들을 형문刑問하고 추국推鞫할 것. 둘째 경상·전라도에 유이流移한 자의 신분을 삼읍의 호적과 대조하여 보고할 것이라고 했다. 이때 도민의 궁핍 현상을 지적하고, 그 대책을 강구할 것을 요청했다.

이듬해 사간원 정언이 되어 임사홍任士洪의 국정농락과 간사하기 이를 데 없음을 규탄했다. 권경우는 국왕의 수렵 활동에 있어 승지와 사관의 대동을 금하며 그 불가함을 주장했고, 국왕의 거동에 대해 사소한 것이라도 기술하게 했다.

1486년에는 사간으로서 평안도병마절도사 이조양李朝陽의 군비 소홀과 군공 사칭을 탄핵 면직시켰다.

그 뒤 형조참의·동부승지·우승지·도승지를 역임, 1498(연산군4)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사찰 건립의 불가함을 논하고, 정숭조鄭崇祖, 이창신李昌臣 등의 탐폭을 규탄했다.

 

권극중權克中 존성흥학비尊聖興學碑(대정향교)
권극중權克中 존성흥학비尊聖興學碑(대정향교)

권극중權克中문신, 대정현감. 전라도 부안현에서 태어나 호는 청하靑霞, 17세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배워 학식이 높았다.

아버지는 권준權俊, 형은 권극화權克和이다. 한편, 재임 중 존성애사비尊聖愛士碑를 대정향교 옆에 세웠다.

또 동년 이원진李元鎭 목사의 지시에 의해서 대정향교를 단산簞山 남쪽 모통이로 이설하는 주역을 맡아 도감都監 강천로姜天老로 하여금 이 일을 다하게 했다.

1612(광해군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조정이 흐려지자 통곡해 숨어 살았다.

1653(효종4) 6, 조정황趙廷璜의 대정현에 도임하고 16559월에 떠났다. 본래 향교는 대정현 성안에 있었던 것을 이때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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