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쌍둥이 감
샴쌍둥이 감
  • 제주신보
  • 승인 201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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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수필가

예닐곱 해 자란 마당의 감나무에 중후한 가을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주황색으로 분칠한 둥글납작한 열매들이 가지를 휘청인다. 예제 갈색 무늬가 번진 잎들도 물기를 털어내며 땅으로 낙하한다.

참새, 동박새, 직박구리와 까치까지 드나들며 쪼아 댄 열매는 유독 붉은 등이다. 핏빛 상처가 은유 조각처럼 푸른 하늘에 매달려 있다.

누가 앞일을 헤아릴까. 포동포동한 자녀들을 키우며 으스대던 두 개의 대봉감 나무는 몹쓸 병이라도 만났는지 텅 빈 집인데, 그 사이에서 소외된 채 품종도 모르는 홍시 감나무가 종내에는 눈길을 당길 줄이야.

전지가위로 아직은 탱탱한 홍시를 하나하나 따서 컨테이너에 조심스레 넣는다. 너나없이 고만고만한 크기이지만 피부는 제각각이다. 주름살 없는 동안에서부터 두어 줄 패기도 하고 십자로 난 골이 네 잎 클로버를 연상케도 한다, 더러는 고운 얼굴이지만 대부분 여기저기 검버섯이 피고 거친 세월이 박혀 있다. 같은 집안 같은 하늘 아래서 자랐는데도 이렇게 생의 이력은 달라지는가 싶다.

작업하던 손이 멈칫하며 샴쌍둥이에 시선이 쏠린다. 양쪽 끝에 배꼽을 달고 뭉툭하게 붙어 있다. 꼭지를 잘라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펴본다. 수직으로 세우니 숫자 8이나 가분수의 눈사람처럼 보이고, 수평으로 눕히니 무한대 기호(∞)가 떠오르다 풍만한 엉덩이짝으로도 다가온다. 정체성을 상실한 열매의 고통을 어찌 짚어낼 수 있을까.

어디서 읽은 ‘꽃의 장애는 문명의 비극’이란 표현이 떠오른다. 인간으로 하여 자연은 얼마나 몸살을 앓고 있는가. 여러 가지 수식어를 동반한 올여름 불볕더위도 우리에게서 나왔을 테다. 봄과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은 길어질 거란 얘기도 들린다. 기후가 어떻게 돌변하고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그야말로 안개 속이다.

샴쌍둥이는 몸의 특정 부위가 서로 붙어 그걸 공유한다. 두 생명이 한 몸으로 살아야 하는 비극의 무게이며 사랑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어깃장이라도 놓아 몸을 움직이는 주도권을 서로 고집하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수시로 마음을 모으거나 행동의 주체를 상대에게 양보해야 삶이 가능해진다.

세상에는 정신적인 샴쌍둥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각자 이념을 껴안거나 머리 위로 올리기도 한다. 고통의 장애가 아니라 생의 의미를 구현하려는 표상이다. 누군가는 진리를 탐구하고 선을 행하며 미를 창조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또 누군가는 돈 쪽으로 향하고 표를 셈하고 그저 남 따라 걷기도 한다.

자연에도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를 빛내는 것들이 무수하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소리와 침묵, 꽃과 나비…. 모든 게 촘촘한 관계망으로 얽히고설켰다. 이 복잡 미묘한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끌어안고 있는가. 허공을 본다. 날갯짓이 무수한 길을 내고 바람도 묻혔는데 내 자국은 가뭇없다.

다시 감나무로 눈길을 준다. 지난해에 몇 개 달리더니 올해는 개수가 꽤 늘었다. 북쪽 정원수의 그늘을 피해 양지에서 열매를 키우려고 햇볕을 쫓다 보니 남쪽으로 줄기가 많이 휘었다. 우리 8남매를 키우느라 어머니 허리도 저리 휘었지 않은가.

장애 동생을 품고 30여 년 날마다 밥상을 차린 어머니가 요양원 방 한 모퉁이 침대에 누워 생을 반추하신다. 눈 뜰 기력도 없어 감은 눈으로 들창 너머 뿌연 하늘을 바라보시는 모습이 는개 속을 헤쳐 온다. 모자간에 샴쌍둥이처럼 살고자 했을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힘들고 불편하다며 싹둑싹둑 잘라 버린 자리에 회한의 나무만 자란다. 그게 인생이라고 내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쟁반 위에 올려 있는 샴쌍둥이 감을 응시한다. 하나의 작은 우주다. 몸과 마음으로 짝을 이뤄 뒹굴다가, 신과 인간이 거처하다가 억새와 바람의 놀이터가 되었다가 ….

연시로 익는다 해도 실존을 맛보려고 감히 깨물진 못하리니. 파란 하늘 올려다보는 저 붉은 두 눈망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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