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택트렌즈
콘택트렌즈
  • 제주신보
  • 승인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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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집을 나서려면 매번 신경 쓰는 일이 있다. 안경을 쓰기 전에 왼쪽 눈에 콘택트렌즈를 끼워야 한다. 십여 년 된 일인데도 가끔 잊어버려 대문을 나서거나 심지어 몰고 가던 자동차를 되돌리기도 한다.

젊었을 때 지인의 실수로 한쪽 시력을 잃은 아픔이 아직도 꺼진 불 살아나듯 도진다. 물론 콘택트렌즈를 꼈다고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뿌연 눈동자를 다소 가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줄이려는 심산에서다.

이런 연유로 사람과 마주할 때면 무의식중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얼굴 사진을 찍을 때도 사진사에게 다친 눈을 보정하도록 요청해 놓고, 남의 눈을 속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찡긋 눈인사를 보내지 못하는, 실존의 껍데기에 짓눌려 있다.

어쩌다 눈병으로 한쪽에 안대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괜히 두 눈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어쩌랴, 이가 없으면 잇몸이 대신하듯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사노라면 적응력이 생겨 견딜 만하다. 가끔 맹인을 떠올리며 한 눈에도 감사하게 되는 걸 보면, 삶이란 운명을 어르는 일인가도 싶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 운명도 내게 불운을 신앙의 눈으로 갚아 주었다.

얼마 전 태풍 콩레이가 난장을 절정으로 솝뜨게 할 때의 일이다. 어둠이 몰려오는 시각에 성당을 다녀오려고 옷을 갈아입는 나를 보며, 아내의 목소리가 깨진 유리창 지나듯 들려온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화하지 마세요. 절대로 받지 않을 테니까요.”

궂은 날씨에 운전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을 앞세운 최후통첩이다.

무늬만 드러내는 신앙의 길이지만 핑계가 초라할 땐 걸어야 한다. 들메하고 막상 현관문을 밀치니 마음이 멈칫한다. 태풍이 큰 날갯짓으로 굵은 빗방울을 마구 뿌려대며 머리를 굽히지 않으면 뭐든 동강 낼 태세다. 쁘레시디움 주회가 아니라면 아예 밖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우산으로 비를 피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다녀오면서 마음은 젖지 않았으니, 큰 우산 아래 선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세상의 죄악들을 보며 단정할지 모른다. 신이 악을 없애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 한다면 무능하다고. 능력은 있지만 그럴 의지가 없다면 선하지 않다고. 이런 생각이 들면 성경 집회서에 나오는 ‘인간의 자유’를 읽어 보도록 권하고 싶다. 하느님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면서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맡기셨다. 계명의 요체는 사랑이다. 어찌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 탓으로 돌릴 수 있으랴.

가끔 콘택트렌즈가 까탈을 부린다. 동공에 밀착되지 않으면 틈이 생겨 공기가 스미면서 렌즈는 물기를 잃고 굳어져 눈을 아리게 한다. 그곳으로 저절로 손이 갈수록 렌즈는 접히며 무게를 키워 밖으로 떨어지려 한다. 이럴 땐 참 난감하다. 거울 있는 곳을 찾아 다시 끼우거나 서둘러 귀가해야 한다. 행여 렌즈에 금이 생길 양이면 새로 사야 한다.

눈의 본질은 의당 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겪어 보니 그것만도 아니다. 외모는 차치하고라도 눈물의 통로가 아닌가. 볼 수 있어 사람이 아니라 울 수 있어 사람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어느 시인은 가을에 부디 아프지 말라고 위로하지만, 역설로 들린다. 맨눈으로 깊이 아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