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맞다
그 말이 맞다
  • 제주신보
  • 승인 201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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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신문에 글을 쓴 지 올해로 사반세기가 넘는다. 지방지를 넘나들며 써 왔다. 그중에도 제주新보와는 특히 연이 깊다. 제주일보 시절의 ‘해연풍’ 필진에서 논단으로 옮았다가 ‘안경 너머 세상’에 발을 놓았다. ‘제주일보’에서 사명(社名)이 ‘제주新보’로 바뀌는 곡절을 지켜보며 불끈 필력을 세우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상식을 벗어난 몰풍스러운 세태에 부대끼며 혹독한 수난의 고비를 견뎌 온 신문. 폭풍한설에 모질이 고운 꽃을 피우는 들풀 같아,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사필귀정, 대법원 최종 판결의 낭보도 들려왔다. 정의로운 신문이라 다져진 길이 탄탄대로다. 요즘 글을 올리는 필진들도 신명이 났을 테다.

나는 신문에 올리는 글에 매우 신중한 편이다. 신문은 세상의 눈이고 귀다. 마음이고 숨결이다. 여론으로 사회를 선도하는 공기(公器)라 한 치도 소홀할 수가 없다. 눈에 안 보이되 늘 신문의 힘을 감지하며 글을 쓴다. 멀리서 가까이서 반응이 나타난다. 그것은 날 서고 섬세하기까지 하다. 쓸수록 힘들고 어려운 게 칼럼이다. 그래서 소재 선택과 안에 담아낼 주제 설정에 여간 고심하지 않는다. 난해하면 너무 무거워 부담을 주고, 가벼우면 너무 헤퍼 눈을 돌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영합주의를 지양하되 흥미로운 요소를 외면할 수도 없다. 예전에 혼자 떠들다 시간이 끝나면 나가 버리는 수업을 ‘공자 왈’이라 했다. 신문 글의 함정을 스스로 파서야 되겠는가.

내용만 아니다. 정밀한 문장, 문장 전후의 맥락과 어휘 선택 그리고 문단 간의 연결 관계에까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또 하나, 표기법을 특별히 챙기는 버릇이 있다. 두 군데 글방에 나가면서 내걸고 있는 표방이 ‘좋은 수필, 정확한 표기에서’와 ‘바르게 씁시다’다. 국어를 오래 가르쳤던 직업의식의 발로인 듯하다. 실제 주변에서 책을 낼 때 책임교정을 도맡다시피 하고 있기도 하다.

한데 ‘안경 너머 세상’을 쓰면서 몇 번 오피니언 담당 기자에게 덜미를 잡혔다. 〈오사카에서 사흘〉을 내보냈는데, 내용에 처제 ‘게이꼬(景子)’란 외래어 표기가 들어 있었다. 입말로 ‘~꼬’지만 글말로는 ‘~코’라야 맞다. 내가 그만 오류를 범하고 만 것. 꼼꼼한 이윤주 기자다. 느닷없이 메일이 왔다. “선생님,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에 ‘~코’로 돼 있어요. 확인해 알려 주십시오.” 딱히 틀렸다 하지 않은 젊은 여기자의 겸양에 낯 뜨거워지고 말았다. 퍼뜩 떠오르질 않는가. 피천득의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朝子)’. 아쁠싸! 이를 어쩌면 좋으냐. 바로 투항(?)해 답장을 보냈다. “이윤주 기자, ‘게이코’로 고쳐 주세요.”

외래어표기법상 파열음일 때 된소리는 격음을 쓰도록 하고 있다. 헷갈리는 게 적지 않다. ‘꼬냑’이 ‘코냑’이고, ‘모짜르트’가 ‘모차르트’, ‘빵빠레’가 ‘팡파르’. 궤를 같이 하는 것들이다. 좀 다른 경우지만, ‘난센스’는 ‘넌센스’로 쓰기 쉬우나 왔다 갔다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센스’다. 그게 ‘non stop’과 같은 부정의 접두어 ‘non’이라 그런다.

다소 불편해도 따라야 하는 게 표기법이다. 외래어표기법도 엄연히 국어에 관한 규정이 아닌가. 외래어는 귀화해 국적을 바꿨으니 국어다.

표기법에 소홀하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그나저나 교정엔 왕도가 없다 했다. 그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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