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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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혜 수필가

초가을, 수덕사로 오르는 숲속엔 꽃무릇이 애잔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일주문부터 대웅전으로 오르는 양쪽 소나무 숲 그늘에, 잎도 없이 올린 꽃대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새봄에 잎이 올라와 여름엔 슬며시 사라져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더니 초가을에 꽃대궁을 올려 주홍빛으로 피어나는 꽃무릇은,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상사화라고도 한다나. 이 절에서 스님으로 살다 입적하신 일엽스님, 이승에서 못다 이룬 애닮은 사랑, 꽃무릇으로 다시 찾아 온 스님의 넋이라도 되는 양 애달프다.

일엽(김원주)는 일 세기 전 일제 하, 남성 중심의 시대에 여성에게 씌운 족쇄를 풀고 철벽을 뛰어넘은 여성 해방 운동가였다고나 할까. 그 시절 두 번이나 이혼을 하고도 수차례 화려한 남성 편력을 가진 자유인이요, 시인이며 소설가요, 수필가요 언론인으로서 당시의 인습에 억매이지 않았다. 허나 실연의 상처를 딛고 서른두 살 때 이곳 수덕사에 이르러 만공스님의 법문을 듣는다. 무엇이 그분을 부처님께 귀의하게 했을까, 생의 허무였을까, 삶의 막다른 길목으로 이어진 현실도피였을까. 인습에 대한 환멸이었을까. 아니, 영원한 진리를 찾아 깨달음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었을 것이다.

조실부모했던 그녀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은 첫 남편의 후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유학 중에 만난 일본 명문가 자제인 오오타 세이료와 사랑에 빠진다. 거기서 아들을 얻었지만 시댁 측의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 못한다.

일엽은 청춘을 전부 불사르고 불가에 귀의 했을까, 귀의 후에 청춘을 불살라 버렸을까. 독립운동가이자 수덕사의 주지인 만공스님의 상좌가 된 그녀는 절필을 약속하고 20여 년 집필을 중단한다. 그 후 예순이 넘어 『청춘을 불사르고』를 세상에 내어 놓는다. 이 땅에서 태어난 여자로서 그녀만큼 인습에 매이지 않고 극과 극으로 산 인생도 드물 것이다. 인간 욕망의 허무와 허상과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한 한이야 어찌 씻을 수 있었겠는가. 수덕사의 문화해설사보다 우리 일행과 같이한 박상인 문인화가가 그녀를 더 잘 알았다. 박 화가가 어리던 시절 이곳 만공스님의 제자에게 서예를 배우며 드나들다 들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였던 주지 만공스님은 일엽의 아들인 일본인 대학생에게 군자금을 나르게 했단다. 일본인이라 일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으리.

수덕사 일주문 윗편엔, 그 당시 미술혼을 불살렀던 고암 이응노 화백의 넋이 깃들고 있는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원래 수덕사 객사였다. 일엽도 스님이 되어 비구니 암자로 들어가기 전 까지는 그곳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객사로 쓰던 것을 만공스님이 고암 이응노 화백에게 불하하여 여관 겸 그의 작업실과 거처가 된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수덕사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응노 화백의 고향 생가와 거기 딸린 기념관을 거쳐왔다.

화백은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그림을 세계화 시키고자 한국전쟁 후 파리로 떠난다. 월북했던 큰아들과의 연결로 그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대전 교도소에서 4년 복역한다. 당시 본부인인 박귀희 여사가 수덕여관을 하며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그러나 고암은 출소하여, 제자였던 박인경 화백과 다시 파리로 돌아간다. 수덕여관, 박귀희 여사의 눈물이 깃든 곳이다. 남편의 제자였던 박인경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홀로 수덕여관을 운영하다 떠난 박귀희 여사의 한도 꽃무릇이 되었지 싶다.

동 시대, 이 수덕사 인근에서 태어나 수덕사에 출가하여 후일 백담사에서 스님이 되어 삼일 운동의 삼십삼 인 중 한분이셨던 만해 한용운도 수덕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분들은 암울한 동시대에 태어나 인생을, 예술을 조국애를 불태웠던 분들이다. 수덕사와 깊은 인연을 가진 이 세분, 아니 만공스님의 넋도 꽃무릇이 되었으리.

이루지 못한 사랑, 조국애 그리고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들의 넋이 꽃무릇으로 다시 태어나 이 가을 산사는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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