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벼슬 버리고 부모 섬기는 것이 유가의 도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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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 제주경차관…노략질 왜구 회유
권일신, 정약용과 교계제 앞장
권준, 육군 1훈련소장 등 역임
권즉, 이양선 정착에 환해장성 수축
권진, 제주목사…김수성 후임
권진응, 대정현 창천리서 유배 생활
바다로부터 침입해 오는 적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환해장성의 모습. 제주목사 권즉은 우도와 제주 연해를 측량하기 위해 내도한 이양선에 대비해 환해장성을 수축했다. 연합뉴스
바다로부터 침입해 오는 적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환해장성의 모습. 제주목사 권즉은 우도와 제주 연해를 측량하기 위해 내도한 이양선에 대비해 환해장성을 수축했다. 연합뉴스

권윤權綸1415(태종15)~1493(성종24), 문신. 제주경차관. 호는 소요당逍遙堂, 본관은 안동,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권숭례權崇禮의 아들이다.

1447(세종29) 녹사錄事로서 친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했다.

1454(단종2)에 주서注書에 제수됐으며, 1455년 세조 즉위에 협조해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이 되고, 1457(세조3)에 호조좌랑에 승진했다.

1460년 낭청郎廳으로서 가자加資됐으며, 이듬해 사인舍人이 되고, 이해에 문신월과文臣月課에서 시부詩賦로 장원했다.

1463(세조9)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로 옮겨 좌익위左翊衛로서 제주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도에 침투한 왜인들의 노략질을 막고 그들을 회유하여 보내는 등 민정에 힘썼다.

동년 11월에 권윤은 제주에서 붙잡은 왜인 48명을 후하게 대접하고, 각기 양식 3두씩 주고 본국으로 귀환시키기도 했다.

1463년 윤 7월에 제주경차관으로 떠날 때 가지고 갈 사목事目왜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우리나라의 물건의 출처를 물어볼 것. 국문할 때 필히 관용과 엄중을 요령 있게 반복 힐문詰問할 것. 만약 도적질해 갔으면 가두어 두고, 도적이 아니면 후대하고 치계해 윤허를 받으라했다. 그가 대교待敎가 되자 춘추관 기사관을 겸해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1478(성종9) 대사성이 되어 국가 교육을 주관했으며,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었다. 14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권일신權日身1751(영조27)~1791(정조15), 학자. 유배인. 본관은 안동,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庵, 교명은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 Xavier). 갈산 출신. 권근權近의 후손, 아버지는 관찰사 흠, 형은 철신哲身이다.

1782(정조6)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프란시스코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뒤 이벽·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해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李存倉(혹은 이단원)을 입교시켰다.

1785년에는 서울 명례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식으로 교회 집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이후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지만 학행과 가문으로 인해 무사했다.

1786(정조10)에 이벽이 사망하자 조선교회의 재건을 위해 조동섬趙東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8일간 피정하면서 신앙을 더욱 두텁게 했다.

그리고 추조적발사건으로 흩어졌던 초대 교회의 주역들인 이승훈, 정약용丁若鏞 형제 등과 함께 더욱 견고한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세웠다.

이것을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교가 되었고 다른 동료 교우들인 이승훈, 최창헌, 이단원, 유항검 등은 각기 사목을 시작했다.

그러나 1789년에 이들 가성직자의 유효성에 대한 의혹이 일어나 북경 주교 구베아(Gouvea)에게 문의한 결과 그들의 사제성직司祭聖職의 집행이 부당한 것임을 알게 되자, 1790(정조14) 즉시 평신도로 되돌아갔다.

최창현崔昌顯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욱 열심히 천주교 포교에 전력하다가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타인의 고발로 체포됐다. 당시 그는 자질과 덕망을 높이 평가받던 터라 제주도로 귀양 보내라는 판결에 그쳤다.

권준權晙육군 제1훈련소장, 중국 상하이에서 대학 졸, 육사 8기생, 1952년 육군 제1훈련소 부소장을 거쳐 북부지구 경비사령관을 거쳐 제3관구사령관, 대정고 학생에게 특강을 벌였다.

5사단장에서 19566월 소장 예편,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1845년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호 함장 벨쳐가 작성한 제주도 해도.
1845년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호 함장 벨쳐가 작성한 제주도 해도.
사마랑호 함장 벨쳐가 그린 제주 정의현 관리의 모습.
사마랑호 함장 벨쳐가 그린 제주 정의현 관리의 모습.

권즉權溭1792(정조16)~?, 문신. 제주목사. 본관은 안동, 권복權馥의 아들, 1827(순조27) 문과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 1844(헌종10) 12, 이용현李容鉉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462월에 승지承旨로 제수되었다.

1845년 여름 이양선異樣船 1척이 우도 앞바다에 정박, 중국 사람 오아순吳亞順이 타고 있었다.

우도와 제주 연해를 측량하자 목사 권즉은 마병馬兵·총수銃手·성정城丁을 모아 조련, 에 대비하며 또 환해장성을 수축했다.

이 배는 1845522일 조선의 남해안을 탐색하러 온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호였다.

함장 에드워드 벨레허(Edward Beleher)가 측량을 하기 위해 정의현 종달리의 지만포止滿浦와 우도에 내박했다.

권진權軫제주목사. 1538(중종33) 3, 김수성金遂性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408월에 파직했다.

권진응權震應?~1775(영조51), 학자. 유배인. 자는 형숙亨淑, 호는 산수헌山水軒, 본관은 안동, 정신正臣 권상하權尙夏의 증손, 목사 권정성權定性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징사徵士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수학, 독서를 많이 했으나 과환科宦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는 덕성이 순근醇謹하고 학문이 독실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켰다.

초선抄選에 뽑혀 자의諮議(시강원의 정7)로 뽑혔으나 유곤록裕昆錄에 대해 상소로 논한 것 때문에 제주에 유배하게 됐다.

권진응은 1771(영조47) 3월에 대정현 창천리로 유배, 그곳에 살면서 호를 산수헌이라 하고 또 지명에 의해 창주정사滄洲精舍라고 일컬었다.

1772(영조48) 1월 연령이 60세가 넘었다고 해서 특별 사면에 의해 유배 생활이 풀려 돌아가게 되자 지방 유지와 사림士林에게 건의해 송우암적려유허비宋尤菴謫廬遺墟碑를 세우게 했다.

일부에서는 산수헌의 아들 권중립權中立이 진안현감으로 있었는데 이는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것이 유가의 도리가 아닌가라는 말이 있었다.

권진응은 열녀 김씨전을 지어 남겼으며 또 정의의 의사 오흥태吳興泰의 창의倡義 격문을 읽고 그 글 내용의 절절함을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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