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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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냉장고에 식재료를 턱없이 오래 넣어 두면 안된다. 상할 위험성이 크다. 유통기한은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다. 넘기면 탈난다는 적신호다.

머릿속의 지식 정보도 매한가지다. 쌓아 해묵으면 낡아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 지식 정보는 폐기 처분해야 한다. 많은 지식인의 지식냉장고에는 진부한 것들로 그득하다. 속엣 걸 치우고 정리할 일이다. 머리라는 지식냉장고도 신선도가 생명이다.

한국에서 1년 동안 나오는 책은 무려 8만이 넘는다. 공공도서관은 1050군데, 작은 도서관이 6400군데로 해마다 50군데 이상이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다 학교 도서관이 1만1000군데가 넘는다. 좋은 독서 환경이다. 놀랍다. 하지만 한국인 셋 가운데 한 사람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두 번 놀란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사회의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를 뜻한다.

사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지식냉장고가 신선한 것으로 차고 넘치는 듯이 행세한다. 많이 읽은 것처럼 말하고 잘 아는 것처럼 요란을 떤다. 신간을 읽지 않고서도 읽은 것처럼, 요약된 것들만 일별하고 다 아는 척하는 수도 있다. 이건 분명, 허세다. 그들 마음속 황량한 풍경이 들여다보인다.

고사성어를 꺼내들거나 낯선 외래어를 사용해야 자신의 지적 층위를 높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종의 현학(衒學) 취미다. 현학(玄學) 아닌, 이런 취향은 무책임하고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로 지탄 받을 일이다. 결코 제멋에 사는 세상이란 말로 어물쩍 넘어갈 게 아니다. 냉장고라는 이기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무식이요 무지다.

남에게 우둔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가면을 쓰고 나서서 춤출 일인가. 자중자애로 가만있으면 뭐라 하나. 유통기한이 지난 묵은 것들로 꽉 찬 채 지식냉장고가 전혀 순환되고 있지 않음을 만인 앞에 드러내는 것임을 자신만 모르고 있다면, 그런 슬픈 일이 없다.

쓸쓸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달도 차면 기운다. 한때 이목을 끌었던 당당한 지위도 기한이 있는 게 이치다. 때가 되면 빛바래 퇴락한다. 한순간에 빛을 잃는 일몰의 시간이 온다. 지식 또한 의외로 휘발성이 강해 이내 증발해 버린다. 새것으로 갈아 넣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한 번 들어가면 평생 확보되는 자리라면 민망하다. 철가방이란 이를테면 경종이다.

부끄러운 것은 나이가 아니다. 운동하는 것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성장하고 있는 한 늙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을 때 늙음엔 유보되는 상당한 탄력이 붙는 법이다.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확대하려는 꿈을 접은 지 오래됐다 해도 하던 일을 더욱 올차게 하려는 의지는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단순해졌다고 그 단조함을 꺼려할 이유는 없다. 삶이란 어차피 점차 간소해 가는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축적하는 과정일 테니까.

나는 몇 줄의 글을 쓰며 나이를 채워 가는 소박한 삶에 자족하고 있다. 쓰는 것은 멈추지 않고 성장하고 있음이다. 아직도 언어의 허기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매양 전전긍긍하고 있다. 새로운 어휘 하나와 만나면 기뻐 환호작약한다. 그 말 하나가 글 속으로 스며들 때, 그 성취를 무엇에 견주랴.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는 작지 않은 기쁨이다. 내 지식냉장고는 아직 순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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