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저녁 무렵에
  • 제주신보
  • 승인 2018.11.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영미 수필가

어스름께 박명이 드리워진 하늘에 걸작이 걸린다. 치열했던 하루를 마감하는데 하늘에 짙은 어둠이 드리울 법도 하건만, 잘 살아냈다는 신의 전언인가 환호 소리 자약하다. 노을의 행렬은 땅거미 드리워 소멸하는 시간, 신의 은총으로 충만케 한다.

이미 심장은 리듬을 타고 노을 가까이 가 닿는다. 훌쩍 여행이래도 떠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정신의 허기를 채우고 싶은 허우적거림이다. 어디인들 떠나서 안착하면 그곳이 고향 같은 곳일까. 귀소본능이 부스스 일어난다. 외로움이 밀려오지만 공허함을 주지 않아서 다행이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떠났던 아이들이 바퀴를 돌리며 아파트 마당으로 돌아오고, 비어있던 주차장은 온종일 고된 육신을 놓아 쉬고 있는 자동차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맞은편 아파트가 부활하는 듯, 하나둘 불빛을 밝히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불야성을 이루어 가고 있다.

길 건너 24시 편의점 벤치에는 삼삼오오 일행들이 캔 맥주 한 잔 기울이며 크게 웃어젖힌다. 표류하던 하루가 정착한 저녁, 오늘의 반이 소멸해 버린 아쉬움을 안고 내일을 향해 건배를 든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이 시간의 에너지가 오늘의 애환을 보듬어 주고 있다.

얼마나 바둥거리는 하루였을까. 모두 다 웃는 시간은 아니었을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물녘은 생기가 돈다.

내 인생도 저녁 무렵인가. 이순(耳順)이다. 직역하면 귀가 순해졌다는 뜻, 어떤 말을 들어도 객관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쓰여진 예순 살. 내 삶이 순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건 아닌지, 뾰족한 가시 끝이 조금이라도 마모되고 있는지 반신반의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육십 년을 살아버렸으니 한순간이다. 돌아보면 얼마나 허방만 짚던 시간이었는가. 내비게이션에도 뜨지 않을 첩첩 오지 같은 길을 애써 걸어왔으니 이제 쉬고 싶다.

누가 가지치기라도 할라치면 내 아집이 너무 커서 다가올 수나 있었던가. 전정되지 않은 과실수처럼 빈 가지만 무성하다. 쓰레기 더미 같은 아집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도정 의식을 묵언이 치러야만 한다. 신께 맡긴다. 절대자에게 내 나약함을 통째로 봉헌하고 그 이끌어 주심으로 순리에 따라 살아볼 도리 밖에 더는 어쩌지 못한다.

서서히 육신이 소멸하는 게 두렵기까지 하다. 보청기를 끼지 않고 살기를 바라며 귀를 비벼주는 일, 서서히 마모되어가는 무릎관절을 위하여 부지런히 걷는 일, 맛있는 음식 먹는 낙(樂)이 전부인 노후를 대비해 잇몸 관리를 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욕망을 내려놓아 마음을 정비하면 육신도 생성되는 반전이 올 터인즉, 한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일이 다반사다. 시나브로 소멸되어가는 생 앞에 두려움을 해독할 방편은 사람들과 동행하는 일이다.

마크 트웨인은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라고 이르거늘.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내 마음을 다스리기엔 아직도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더 수행해야만 하는 어설픈 행각이다. 마음이라도 먼저 열어야지, 말이라도 먼저 붙여야지 이 쉬운 일도 못하고 있으니.

이제는 애쓰지 말고 내려놓는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 도덕경 제19장에 이르는 소박(素樸)성 회복, 소(素)는 아직 염색되지 않는 흰 실, 박(樸)은 가공되지 않은 통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아집을 버리고 욕심을 줄이는 일, 소박을 마음에 초대한다. 무늬만 화려한 겉치레가 부끄러워 민낯의 나로 대낮을 견디려 한다.

어둠에 잠식한 세상. 하늘은 서두르지 않고 잿빛을 받아들여 또 다른 작품을 연출한다. 경이로운 광경이다. 박명은 소멸하는 게 아니고 저편에서 익어갈 것이다.

마음을 다잡아본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 하지 않는가. 세상도 내 인생도 서서히 저물어가건만 생성을 향한 도약이다. 원곡보다 편곡한 음률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