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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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논설위원

그를 안 것은 최근 제주시가 주최한 시민행복 인문강좌에서다. 교과서에 언급된 적이 없어 당연하다 할 수 있으나 50대 중반이 되도록 몰랐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판사 출신 독립운동가인 박상진(1884~1921)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해 평양 지원으로 발령 났지만,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바로 그날 판사직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일제의 관리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단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11년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가진 뒤 다음 해 돌아와 대구에 독립군의 정보 연락과 재정지원을 위한 상회를 설립했다. 그 후 1915년 비밀, 폭동, 암살, 명령 등 4대 실천강령을 지닌 국내 최대 의열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조직, 총사령을 맡았다. 1917년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대구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청산리전투로 유명한 김좌진과 미국에서 최초의 항일비행사 학교를 설립한 노백린도 광복회 출신이다.

▲을사5적은 판사 출신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대한제국 시대 지금의 대법원 격인 평리원(平理院·1899~1907년)과 관련 있어서다. 이완용을 제외한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용현은 평리원의 재판장 혹은 재판장 서리를 거쳤다. 오늘로 말하면 대법원장이나 대법관을 지낸 셈이다.

대한민국 역대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13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친일반민족 행위자는 4명.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이도 19명이다. 시류에 영합한 판사들은 독립운동가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며 호의호식했다.

한 대법관은 조선총독부 판사로 재직하는 동안 독립운동가 14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또 다른 판사는 54명에게 옥고를 치르게 했다. 당연히 ‘친일’로 낙인됐다. 후손들은 소송을 제기하고 있지만, 친일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재판부의 심판은 대개 이렇다. “판사가 독립운동가에게 사형, 징역형과 같은 실형을 선고하는 행위는 우리 민족 구성원에 대한 탄압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내부자끼리 충돌하는 ‘판-판’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사법 농단 의혹에 연루된 법관에 대한 탄핵론이 제기된 것은 사법부가 자초한 업보다. 거슬러 올라가면 항일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고 친일을 엄하게 다스리지 못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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