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美 장교가 일본군 항복 조인 집행…제주농업학교서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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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취일, 정의현감…노상희 후임
권혁, 이조참의·대사헌 등 역임해
귀금, 여성 명의…치통 등 치료
그린, 미군 대령…종전 뒤 제주 내도
기건, 예 갖춘 제주 장례제도 확립…한센병 치료소 ‘구질막’ 건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5년 9월 28일 제주에 들어온 미군이 패전국 일본의 제58군이 보유했던 총 등의 무기를 수거해 바다에 수장하고 있다. 당시 미군 육군 대령 그린(Green, R)은 제주에서 일본군의 항복 조인을 집행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5년 9월 28일 제주에 들어온 미군이 패전국 일본의 제58군이 보유했던 총 등의 무기를 수거해 바다에 수장하고 있다. 당시 미군 육군 대령 그린(Green, R)은 제주에서 일본군의 항복 조인을 집행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권취일權就一정의현감. 1812(순조12) 8월 노상희盧尙熙의 후임으로 정의현에 도임하고 18144월에 떠났다. 그는 1814년 정의 사람 현윤경玄胤慶을 효자孝子로 정표했다.

권혁權爀1694(숙종20)~1759(영조35). 문신. 정의현감. 청백리에 책록되고 시호는 정간靖簡, ‘선생안에는 권혁權赫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자장子章, 충청도 충주 출신,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유尙遊이다.

그는 1719(숙종45) 진사가 되어 세마로 재직 중 1726(영조2)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에 등용, 또한 난이 일어났을 때 관찰사로서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 권첨權詹을 그의 본가가 있는 도에 충군한 것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극변極邊에 충군할 것을 상소했다.

이어 부수찬이 되어 실각한 소론少論을 비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당론에 치우친다고 해 삭직削職 됐으나, 1727년에는 실록청낭관이 되어 숙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정언으로서 있을 때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적의 세력을 과대평가해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자는 주장을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해 좌절시켰다.

1730(영조6) 10, 이명석李明錫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11월 교리가 되어 전출했다.

한편 권혁은 정의현감으로 불과 재임 1개월 만에 전출돼 곧 전임자 이명석이가 재차 정의현감에 전입되었다.

곧 부수찬에 복직되고 부교리·정의현감을 거쳐 수찬에 재직 중, 1732년 당론을 논의하다가 전라도 해남에 정배됐다

1734년 석방돼 헌납·평안도의 용강현령·이조좌랑·필선·응교를 역임했다. 1737년 사간이 된 뒤 승지 등을 지냈고 1741년에는 대사간이 됐다.

1744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도내 영문 소재 군기軍器를 수리했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옮겨 관동關東의 공삼貢蔘의 폐를 논하고, 도내 속전續田 2200결을 획급해 공삼을 경작하게 해 줄 것을 상소했다.

1747년에는 이조참의·강화부유수를 역임했다. 다음해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대사헌에 등용됐고, 1752년 부제학을 거쳐 1755년에 호조참판, 이듬해 우부빈객·함경도관찰사·지돈녕 등을 지내고, 175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1796(정조20) 청백리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귀금貴今성종 때의 여성 명의名醫. 제주목 태생으로서 이비인후耳鼻咽喉 및 치의齒醫로 유명한 장덕張德()이 이미 죽어 이를 계승할 전업자傳業者가 없자 조정에서는 제주목사 허희許熙에게 지시를 내려 남녀 가릴 것 없이 의사를 뽑아 보내라고 했다.

이에 의녀 장덕의 사비私婢 귀금貴今을 조정에 보내니 그도 의녀醫女로 임명돼 치통·비창鼻瘡·안질 등을 잘 치료해 나라의 삼대 여의三大女醫로 알려지게 됐다.

귀금이 죽은 이후로는 두 의녀의 의술을 이을 사람이 없어 그 비법이 전해지지 못했다.

그린미 군정기의 미군 육군 대령. 그린(Green, R)은 제주에서 일본군의 항복 조인을 집행한 미국 장교이다.

1945815일 일본천황天皇의 항복 선언, 조선에서도 항복을 받기 위해 미군 제 24군단은 95일 오키나와<沖繩>를 출발해 인천에 상륙, 99일 서울의 조선군사령관 고츠키-요시오<上月良夫>’ 중장, 진해鎭海 경비사령관 야마구치<山口>’ 제독, 조선총독 아배-노부유키<阿部信行>’ 등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았다.

제주에서도 동년 928일에 육군대령 그린과 해군중령 월든(Walden)이 요원 38명과 비행기 편으로 내도, 일본군 제58군 사령부(제주농업학교 구내)에서 사령관 도야마-노보루’<遠山 登> 중장, 제주해군사령관 하마다-쇼이치’<濱田昇一>제독 등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일본의 항복 조인식에는 일본군사령관 서명 도야마 노보루, 일본해군사령관 서명 하마다 쇼이치, 제주도 도사島司 서명 센다-젠페이, 미국군재조선사령관 육군중장 죠지 알 하지, 대리 수령자 미국 육군대표 육군대좌大佐 로이에 그린, 미국 해군대표 해군중좌中佐 에이 제이 웰든 등 5명이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조인식은 당시 광양의 제주공립농업학교에서 가졌다.

필자의 변 : 나는 194774일 제주농업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고 큰 꿈을 안고 학교를 처음 찾아갔다. 학교 교사 바로 남쪽은 조회장이었다. 조회장 북쪽은 학교의 대운동장이라고 한다. 이곳은 패전국 일본군의 주둔 본부였고 전승국 미국이 주둔하고 있어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어 전쟁의 종말의 무상함을 느꼈다. 미군의 명령에 의해 일본군은 무장 해제돼 일본군 무기는 과양-공설운동장에 산적해 대부분 바다로 던져지고 일부 잔해가 남아 있었다.

제주시 도두2동에 있는 기건의 구질막救疾幕 터에 있는 비.
제주시 도두2동에 있는 기건의 구질막救疾幕 터에 있는 비.

기건奇虔?~1460(세조6), 문신. 제주목사. 시호는 정무貞武, 본관은 행주, 호는 청파靑坡, 고려 때 신돈辛旽의 일당인 현의 후손이다.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의 포의布衣로 발탁돼 지평에 제수됐다. 그 뒤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되었는 데,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고 부임 3년 동안 붕어를 한 번도 먹지 않았고, 제주목사로 나가서 주민이 전복 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다.

그는 부모가 죽으면 구멍이나 언덕에 버리는 제주의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했다.

또한 한센병자를 바닷가 무인지경에 내버리고 자폐하기를 기다리는 비참한 사실을 인지하고 바닷물로 세창洗瘡 목욕과 고삼苦蔘 채취, 마실 물과 식량의 지급이 가능한 성밖의 외진 3개소(제주 대정 정의)에 한센병자를 위한 구질막을 설치하고 의생과 승려로 하여금 돌보도록 했다.

기건이 행한 구라救癩(나환자를 구호) 사업을 약술하면 한센병은 천형병天刑病이 아니라 치료하면 낫는다는 신념을 세워주었고 3읍에 한센병자를 위한 남녀별 전문입원시설을 마련하고 여기에 군역을 면제한 의생과 승려를 파견해 구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보수를 주었으며 병자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지급하고 약물苦蔘元 투약과 해수치료법을 시행해 치료에 가망이 없다던 이들의 인식이 좋아졌다.

이어서 그는 내직으로 옮겨 집의·형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했다.

14477월부터 1450년 윤1월까지 전라감사를 역임, 이후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당시 국왕이 유약함을 기화로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했다.

그 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했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청맹靑盲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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