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길 풍경
공원길 풍경
  • 제주신보
  • 승인 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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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수 수필가

소설을 며칠 앞둔 가을 날씨답지 않게 볕이 좋은 오후이다. 기린 목처럼 빈 하늘을 향해 해바라기하고 선 감나무 세 그루, 달력의 그림처럼 한공寒空을 이고 공원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가지 끝에는 떨어지다 남은 감 몇 알만이 방문객들을 기다리느라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감성을 타고 나지는 못한 둔재이지만 소슬한 바람에 옷깃을 세울 줄은 안다. 볕 줍기에 좋은 장소로 신산공원을 선택했다. 걸어서 3분 정도이면 나무와 오솔길이 있는 공원 벤치에 앉을 수 있다. 그리고 글자 없는 책 몇 쪽도 읽을 수가 있다.

트인 곳만 있으면 어디든 걸림 없이 내닫는 바람도 낙엽 쌓인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잔디밭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언저리 의자 위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있다. 그야말로 한가로운 공원 풍경이다.

방학 때는 외손자, 명절 때면 친손자들이 번갈아 찾아와서 공도 차고 배드민턴 채도 휘두르던 그 장소이다. 그 녀석들이 지난 추석에 왔을 때 이제는 다 컸노라고 같이 놀아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은근히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게 순리인 것을 어쩌랴 싶어 아예 초연하기로 했다.

뛰어놀던 한 어린이가 무엇에 걸렸는지 넘어졌다. 울음소리보다 먼저 할머니 한 분이 손을 내저으며 일어서려다 털썩 주저앉고 만다.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분인 모양이다. 같이 놀던 다른 아이가 와서 일으켜 준다. 할머니는 그제야 다가와서 꼭 안고 울음을 달랜다. 조손祖孫 간의 긴 포옹이 낯설지 않다.

‘걸음아 날 살려라.’는 무서운 상대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이들이 달아나면서 내지르는 소리이다. 몇 년 전에 허리디스크로 고생했던 일이 있었다.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조금 삐끗거렸던 적이 있었는데 방심하고 지나는 사이에 병이 커지고 만 것이었다. 걷기가 많이 불편하여서야 병원을 찾았었다. 병원 가기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 아냐?’ 라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었다. 약을 먹고 물리치료도 받으며 공원에서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몇 개월을 악전고투한 끝에 5분 걷기도 어렵던 것이 차츰 10분이 되고 20분, 30분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올레 길도 가고 오름도 오른다. 완연하게 회복되었지 싶다. 역시 걸음이 나를 살린 셈이다. 그 때 잠시 앉아 쉬던 벤치에 오늘도 그날의 누군가처럼 앉아 본다.

산책 코스 한 바퀴를 돌면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약 1㎞ 정도가 되는 폐곡선을 그리며 걷는 셈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다보면 다양한 풍경들을 볼 수 있어서 식상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어느 때에는 시인이 되었다가 어느 시간에는 대단한 철학자가 되기도 한다.

산책로 주변의 비자나무 아래서 한 아주머니가 뭔가를 줍고 있다. 비자를 구충제로 쓰던 지난날의 추억에 의한 단순행동일까 아니면 어디에 심어보려는 생각에서일까. 문득 다람쥐의 건망증이 숲을 번창 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많은 나무와 풀들이 가을에 씨앗을 땅에 맡긴다. 그리고 마른 잎을 떨구어 씨앗들을 보호한다. 땅도 기꺼이 그들을 품고 긴 겨울을 넘게 해준다. 모성 본능은 사람이나 동물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태계를 온전히 유지하는 힘의 원천은 어쩌면 식물들의 모성본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숲길에서 콩짜개덩굴이 엉겨 붙은 나무 가지를 잘라다가 정성을 들여 보았지만 얼마 못가 다 죽여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뿐인가. 춘란 몇 촉을 돌에 붙여서 살려본다고 기를 쓰다가 실패한 경험도 있다. 그 때마다 느꼈던 허망감과 미안함 때문에 길섶의 야생화에도 욕심을 접게 되었다.

한 바퀴 돌고 ‘6·25 참전 기념탑’ 앞에 섰다. 제주의 젊은이들 일만여 명이 참전하여 고귀한 피를 흘렸음을 돌에 새겨 기억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딛고 우뚝 선 조국의 모습을 그들은 어디선가 보고 있겠지. 탑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참전 용사와 전사하신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 앞에 허리 굽은 할머니와 젊은이가 서 있다.

“할아버지 이름 여기에 있습니다. 할머니.”

굽은 허리를 반쯤은 펴고 비문을 더듬는 할머니의 손길이 어설피 떨리고 있다.

젊은이의 부축을 받으며 되돌아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에 시선이 잠시 멎는다. 높은 가지 끝에 매달렸던 단풍잎 한 장이 나풀거리며 떨어진다. 비둘기들은 어린이와 강아지를 상대로 연신 술래잡기를 하고, 공원광장의 우뚝한 조형물들의 그림자는 꼼작꼼작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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