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사람 만남은 일장춘몽,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순간임을…
(103)사람 만남은 일장춘몽,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순간임을…
  • 제주신보
  • 승인 20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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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원 첨정 안 후 묘지, 동백동산 보이는 전망…현무암 비석 등 놓여
부인 청주 한씨 무덤 최근 이장…음양 법칙에 따라 쌍묘로 조성해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한 통정대부 훈련원 첨정 안 후의 무덤과 최근 이곳으로 이장된 부인 청주 한씨의 무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한 통정대부 훈련원 첨정 안 후의 무덤과 최근 이곳으로 이장된 부인 청주 한씨의 무덤.

너무나 인간적인 품격, 만가(輓歌)

아쉬운 이별에는 사랑만 한 게 없고 아픔의 이별에는 죽음만 한 게 없다.

사랑에는 연가(戀歌)가 있어 그 그리움을 달래고 죽음에는 만가(輓歌)가 있어 그 고통을 삭이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 삶과 죽음이 서로 붙어있어 기쁨과 슬픔도 잠시 동안 서로 뒤집힐 뿐 삶은 생졸(生卒)의 사이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만가(輓歌)란 죽어 떠나가는 사람을 애도하고 그리워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는, 살아남은 자들의 처연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요즘은 상여를 매는 이도, 만가를 짓는 이도 없지만 우리의 장례 전통에는 이런 떠나는 자에 대한 보내는 자의 따뜻한 인간적 품격이 있었다.

만가의 근원은 이미 오래전에 한()나라, ()나라 때 유행하던 상화가사(相和歌辭)와 닿아있다. 당시 만가를 보면 귀족용 만가는 다음과 같다.

염교 위의 이슬 어찌 그리 빨리 마르냐?

이슬은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내리지만

사람은 한번 가면 언제 다시 오려나?’

, 평민용 만가는 다음과 같다.

호리(蒿里)는 누구의 집인가?

혼백(魂魄)을 거두어 가는 것은 잘 나고

못 나고 구분이 없네.

저승사자는 어찌 그리 서두르는가.

사람의 목숨 조금도 머뭇거릴 수가 없구나

이런 전통이 후에 유학자들에겐 문체에 따라 만시(輓詩)와 만사(輓詞)가 있다.

민간에서는 상여 소리로 변형되었다. 인생길에서 사람의 만남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라고 하고 짧은 봄밤과 같다고 한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순간임을 깨닫는다. 동한(東漢) 때의 시로 추정되는 蘇李河梁贈答詩, “좋은 시절 다시 오지 않고. 이별의 순간은 순식간에 다가오네. 갈림길에서 서성이다가 두 손 마주 잡고 들판에서 머뭇거린다. 고개 들어 뜬구름 바라보니 홀연히 서로 지나쳐버리네. 일렁이는 물결처럼 사라지고 나면, 각기 하늘 한 귀퉁이에 있게 되리라. 이번에 이별하면 오래도록 만나지 못할 터이니, 다시 잠깐만 멈춰 서 있기를, 새벽바람 속에 출발하기에 보잘것없는 이 몸 그대를 전송하노라.”

제주의 상여소리는 일명 행상노래라고도 한다.

삶보다 죽음이 더욱 비극적인 양상을 띠고 있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그리며 침울해 하면서도 스스럼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당시 제주의 행상노래는 다음과 같다.

인생 한 번 죽어지면, 어야 농창 어야 노세.

다시 오기 어려워라, 어야 농창 어야 노세.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어야 농창 어야 노세.

대문 밖이 저승이라. 어야 농창 어야 노세.

有情이면 不可忘이요, 어야 농창 어야 노세.

相知不見 하든 님은, 어야 농창 어야 노세.

어이 그리 못 보는고, 어야 농창 어야 노세.

天地間 無情理는 어야 농창 어야 노세.

세월 밖에 또 있는가, 어야 농창 어야 노세.’

 

안후의 무덤에 있는 창을 들고 있는 동자석.
안후의 무덤에 있는 창을 들고 있는 동자석.

안 후()의 무덤

안 후의 묘비명은 지중추부사 자헌대부행동안공지묘(知中樞府事 資憲大夫行同 安公之墓)으로 산담 앞쪽에는 부인 청주 한씨가 이장해 있다.

안 후의 묘역은 지금은 넝쿨이 우거진 소나무 밭이 됐지만 옛날에는 봉긋한 동산이었다.

동백동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많은 공력이 들인 산담 안으로 점점 흐려지는 구름을 뚫고 한바탕 힘없는 겨울 햇살이 내린다.

막바지 계절을 아는 듯 주변의 밀감 밭들은 수확이 끝나 또 한 해가 가는 12월임을 알린다.

안 후의 계출(系出)는 순흥(順興)으로, 생은 강희(康熙) 경진(庚辰, 1700)에 태어나서, 건륭(乾隆) 임자(壬子, 1792) 712일에 돌아갔다.

장례는 동년(同年) 1125일 약 4개월이 지나 선흘(仙屹) 동남쪽 2리 용단밭(龍端田)에 지냈다. 부인은 청주 한씨로 슬하에 43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무과에 급제해 전 만호(萬戶)를 역임했고, 둘째 아들은 토직(土職)으로 천호(千戶)를 지냈다. 안 후는 통정대부 훈련원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증직(贈職)으로 자헌대부가 됐다.

안 후의 무덤은 크고 동자석 2, 망주석 2, 문인석 2기가 조면 현무암으로 만들어 갖춰져 있다. 동자석은 2기 모두 창을 들고 있으면 문인석의 기물은 무엇인지 미상이다.

동자석의 머리는 양각으로 댕기머리를 하고 있으며 석질은 조면암으로 만들었다.

동자석이 창을 든 것으로 보아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 4)이라는 벼슬과 관련이 있다.

훈련원은 조선시대 무과 시험을 조직하며 군사 훈련과 병서(兵書)에 대한 연구를 맡아 보는 관청으로 1467(세조 12)에 설치되었다.

훈련원의 벼슬로는 지사(知事, 2), 도정(都正, 3), (, 3), 부정(副正, 3), 첨정(僉正, 4), 판관(判官, 5), 주부(主簿. 6), 참군(參軍, 7) 등이 있었다.

안호의 아들 들도 만호와 천호를 지냈다고 하는데 만호라는 벼슬의 근원은 몽고족의 군제였다.

만호, 천호, 백호는 민호(民戶)의 호수(戶數)를 지칭하는 것으로, 고려 때에 원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썼는데 순군만호부가 설치돼 고려 군관의 회유, 왜구의 퇴치 등의 업무를 맡았다.

그러다가 차차 만호(萬戶)의 수와는 상관없이 진장(鎭將)의 품계를 나타내게 되고 육군보다는 수군(水軍)의 군제(軍制)에 만호하는 이름이 남게 되면서 조선 초기에 만호, 부만호, 천호, 백호 등이 있다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만호의 품계는 종4품 무관직 벼슬로 제주에서는 애월 만호가 자주 거론되었다.

부인 청주 한씨 이장 후 쌍묘 조성

안 후의 무덤 앞에 부인 청주 한씨가 최근 이장했는데, 합묘를 하지 않고, 쌍묘를 쓴 이유가 바로 합묘를 조성하려면 부부묘가 다른 두 곳에 있다가 이장할 때 다시 묘자리를 정한 후에 합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공의 묘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공의 산담 안 앞쪽에 무덤을 작게 만들었다.

조상이 상()이고 후손이 하()이고, 남자가 우(), ()이고 여자가 좌(), ()이니 청주 한씨는 바로 음양의 법칙에 따라 안 후의 산담 안에 그렇게 묘역으로 조성한 것이다.

산담 좌측 앞 부분으로 올래를 트고 있으며, 무덤의 묘비가 한반도 식으로 봉분 앞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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