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다’의 뜻, 제대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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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낙엽은 떨어진 잎이다. 이층(離層)이란 특수한 세포층이 형성되면서 잎이 가지에서 탈락한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진다. 때가 돼 지는 꽃이 낙화다. 낙엽·낙화란 말에서 ‘지다’는 어감이 유난히 강렬하다. ‘잎이 지다’, ‘꽃이 지다’에서 잎이나 꽃보다 ‘지다’라는 동사 쪽에 매우 강한 인상을 느낀다. 살아 있는 것들의 소멸, 삶의 무상감을 실감한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낙엽을 허무나 감상(感傷) 혹은 염세의 상징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 같은 시각은 이형기 시인의 <낙화>에서 보다 뚜렷해진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이 시에서 낙화는 때 맞춰 지는 꽃을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에 빗대었다. 꽃은 꽃답게 스스로 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함이다. 집착을 버리고 때를 알아 떠나는 자의 아름다운 덕목을 ‘낙화’로 매개해 함축했다. 잎이 지는 것 그리고 꽃이 지는 것은 단순한 현상일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한 시절의 정리, 한때의 정돈은 소멸로 완성된다. 낙엽·낙화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자연의 장엄한 의식이다.

잎과 꽃이 때를 알아 떨어지는 것, 그것은 사람에게 물러날 때를 생각할 줄 알아야한다는 실제적 현시(顯示)다.

퍼뜩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떠오른다. 팽택현 현령이던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심경을 읊은 시. 그것은 세속과의 결별을 진술한 선언문이다. 1장은 관리 생활을 접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정신 해방으로 간주해 담았고, 2장은 고향에 도착해 자녀들의 영접을 받는 기쁨을, 3장에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4장에는 자연의 순리에 맡겨 살아가는 자적한 삶을 술회했다.

시인은 서문에서 체질이 아닌 벼슬을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해 그만뒀다고 기록했다. 일설에 따르면, 먹고 살려 낮은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일이 도무지 맞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높은 벼슬아치가 내려가니 관아를 깨끗이 하고 의관속대(衣冠束帶, 의관을 단정히 함)해 맞아들이라는 공문이 날아들자, “어찌 쌀 다섯 말(五斗米, 적은 봉급) 때문에 허리 굽혀 소인배 벼슬아치들을 섬기겠는가!” 소리 치고는 그날로 벼슬을 그만뒀다고 한다.

‘나 돌아가련다. 논밭이 묵어 잡풀이 우거졌는데 내 어찌 아니 돌아갈 수 있으랴(歸去來兮 귀거래혜 田園將蕪 전원장무 胡不歸 호불귀).’로 시작한다. 첫머리만 보아도 평담(平淡)한 가운데도 뜻이 깊다. 고향으로 돌아가 이 시를 읊고 전원생활을 즐기며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게 절정기인 41세였다. 높은 기개와 고결한 인품을 풍기는 대목이다. 귀거래사가 오늘까지 회자되는 이유다.

고위 공직자들이 정년퇴임 후, 자신이 몸담고 있던 산하기관이나 유관업체 등에 재취업하는 관행이 남아 있다. 낙엽·낙화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잎과 꽃이 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 섭리를 모른대서야 말이 되는가. 물러날 때를 모르는 오늘의 고관대직들, 그들이 가슴에 새겨들어야 할 말이 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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