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왜구의 침략 대비…애월포구 쪽으로 방어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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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 현감 때 장희재 위리안치
김경득, 日 고베 전협 항일 활동
김경복, 제주판관·도총도사 역임
김경봉, 농민조합운동 ‘앞장’
김경생, 만덕봉사상 등 수상
김경숙, 재일 한인 면세 투쟁  
김경순, 4·3 하귀교 순직교사
김경식, 무국대도교 항일활동
제주시 애월읍 애월초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는 애월진성의 모습.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총안(銃眼)과 성곽 보도시설인 회곽도(廻廓道)가 남아 있다. 애월진성은 김경복이 제주판관으로 재임 중인 1581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애월포구 쪽으로 옮겨져 지어졌다.
제주시 애월읍 애월초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는 애월진성의 모습.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총안(銃眼)과 성곽 보도시설인 회곽도(廻廓道)가 남아 있다. 애월진성은 김경복이 제주판관으로 재임 중인 1581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애월포구 쪽으로 옮겨져 지어졌다.

김경金磐숙종 때의 대정현감. 1695(숙종21) 4, 반처렴潘處濂의 후임으로 대정현에 도임하고 169711월에 떠났다.

김경이 재임 중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1697(숙종 23) 3월에 사형에서 감형되어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됐다.

김경득金庚得1913(일제강점기)~1948(분단시대), 일본 공산당과 고베<神戶>에서 전협全協의 항일 활동을 했다.

김경득의 본관은 김해, 김승옥金升玉의 장남으로 중문면 상예리<-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6월 일본공산당의 외곽 단체인 전협 금속노조 오사카지부에 가입하고 동향 출신 강주호姜周鎬의 권유로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다.

마침내 전협 고베지구협의회 준비위원으로 금속 노조 고베 지구의 결성을 위해 몰래 활동하던 중 일경에 검거됐다.

그는 1932628일 일본 고베 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경복金景福선조 때의 제주판관. 본관은 순천, 참봉 김돈金墩의 둘째 아들로 1576(선조9) 급제하고 철산군수를 지냈다.

도총도사都摠都事로 재임 중 1580(선조13) 12월에 유극량劉克良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5834월 부친상을 당하자 떠났다.

김경복이 판관으로 재임 중인 1581(선조14), 김태정 목사가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애월성을 애월포구 쪽으로 이축, 성 주위가 548, 높이 8척에 달했다.

이때 조방장 1, 치총雉摠 2, 서기 7, 성정군城丁軍 130, 차비差備 10, 방군防軍 138명 등이 배치되니 이를 애월진이라고 불렀다.

1582년 봄에 가락천 서쪽에 있는 제주향교를 가락천 동쪽 고령전高齡田으로 이설했다.

김경봉金京奉1908(융희2)~1941(일제강점기),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의 항일 활동,

일명 김경순金京順, 본관은 광산, 김찬규金燦奎의 아들로 제주시 건입동<건들->에서 태어났다.

김경봉은 이익우李益雨(한림) 등과 함께 민족해방 운동에 공명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19347월 양병시, 장창구張昌求 등과 함께 한림노농연구회를 조직, 책임자 겸 가두부街頭部를 맡아 조직 확대에 노력하던 중 동지 62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당했다.

19374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1993413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경생金庚生1920(일제강점기)~?, 여성 운동가, 제주노인학교연합회 부회장, 본관 광산, 표선면<東中>에서 태어나 최근 제주-성안에서 살았었다.

성읍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해 여성단체에 활동했고, 한국노인회 제주도지부 부회장과 대한불교 조계종 성광사聖光寺의 신도회장, 이도1<제주-성안> 새마을 지도위원 등을 맡았다.

그는 활동한 공로가 커서 만덕萬德봉사상과 국민포장을, 또 한국사회정화위원장 표창을 받았다.

김경숙金京淑1915(일제강점기)~1980, 일본 오사카에서 공산당의 항일 활동.

김경숙의 본관은 김해, 김용택金用澤의 아들로 구좌읍 하도리<별방>에서 태어났다.

오사카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19344월 이영복李英福(하도), 김경숙金京淑(하도), 현상호玄尙好(하도), 현호진玄好珍(성산) 등과 함께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조직했다.

전협全協 금속노조 오사카지부 서지구 책임자 홍원표洪元杓(귀덕)에 의해 이영복, 김경숙과 함께 19355월에 그 조직원으로 들어가 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동포의 집세 문제·전기 요금·수도 요금 등의 인하와 면세 투쟁을 벌여 재일 한국인의 혁명 의식 앙양에 헌신했다.

193512월에 검거, 19364월에 기소, 동년 1026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경순金璟順1924(일제강점기)~1949, 순직교사, 본관 김해, 애월읍 하귀리<귀일> 가문동 2698번지에서 태어나 일찍이 도일渡日,

19433월 오사카<大阪> 상궁중학교 5년을 졸업, 오사카 조일건전지朝日乾電池회사에서 1년 반 동안 근무 중 징병徵兵 1기생으로 일본군에 입영했다.

1945년 부모와 함께 하귀리<귀일>로 귀향, 목포사범으로 편입학, 194783일 졸업했고 1947831일 하귀교 교사로 부임했다.

당시 이기일李起一, 강두익姜斗益, 윤국희尹菊姬, 김사묵, 김용순金容順, 김규일金圭鎰, 김영재金英載 등이 재임 교사로 있었는데 관덕정 민전民戰 주최의 3·1시위로 좌우 갈등이 심각했다.

19484·3으로 그의 자택에 괴한이 잠입해 어머니 보는 앞에서 그를 붙잡아갔다. 4·3으로 희생된 그는 순직교사로 인정됐다.

필자의 변 : 나는 초대 북제주문화원장에 피선被選됐다. 그래서 북제주군 군수 신철주申喆宙에 의해 하귀리 옛 5일 장터에 문화원 건물을 지어 4년 동안 근무했다. 나는 하귀<귀일> 등 동십리東十里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상태였다. 4년간 근무하면서 애월읍 동십리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넓힐 호기好期였다. 교사 김경순金璟順에 관한 내용도 그렇다. 2011년 나의 저서 涯月邑名鑑은 이런 자료를 얻었기에 쓸 수 있었다.

김경식金景軾1870(고종)~1940(일제강점기), 민족종교 무국대도교 항일 활동.

본관 나주, 김최영金最英의 아들로 산북 영평리<가시나->에서 태어나 원적지는 화북리<별도>이다.

그는 193510월경 강석구姜錫龜(58, 봉개)의 권유에 의해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에 입교, 포교하면서 일본왕은 물러나고 한국은 독립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어 교세가 날로 늘어 1000여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제주경찰서의 일본인 다니모도<谷本> 고등계 주임에 의해 조사받게 됐다.

결국 19371213일 새벽에 일제히 검거됐다.

그는 1940818일 모진 고문에 의해 옥사했고 동년 124일 광주지법에서 기소중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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