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석상들 눈 크게 뜬 채 변하는 세상에 ‘어리둥절’
(105)석상들 눈 크게 뜬 채 변하는 세상에 ‘어리둥절’
  • 제주신보
  • 승인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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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사망 후 함께 부장돼…봉분 중심으로 좌우 석상 조성
얼굴선 부드럽고 눈 양각 처리…영·정조 때 유행했던 양식
부친은 봉훈랑·조부는 훈련원 주부…비석에 친족 벼슬 세겨
슬픔을 감추려고 살짝 미소 짓고 있는 통정대부 한공지묘 주변에 있는 문인석
슬픔을 감추려고 살짝 미소 짓고 있는 통정대부 한공지묘 주변에 있는 문인석

한해보의 무덤

비석에는 통정대부 한공지묘라고 쓰여있다. 공의 이름()은 해보(海寶), 동래인(東萊人)이다.

비음(碑陰)을 보니 공은 부인이 사망 후 5년 뒤에 부장(祔葬)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산담 안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 마주 보면서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서 있다.

비석이 봉분 앞 정면을 향해 서 있는 폼이 그대로 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대개 제주의 비석들은 영혼이 올래를 드나들며 문패 역할을 하도록 측면으로 세운다.

한해보의 묘역은 매우 넓게 조성돼 있고 바다를 향하고 있다.

요즘 무덤 주변에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밭 가운데 고즈넉한 정경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욕심이란 무한한 것 같다.

농촌이 도시화되면서 제주의 전통 마을은 이제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도시계획이 신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토지에 대한 국가정책과 땅에 대한 개인적인 사유재산의 횡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동자석과 문인석은 석상 형태로 보아 영·정조 시대 유행하던 모습이다.

얼굴선이 부드럽고 눈은 이중으로 양각 처리되었으며 손은 둥그렇게 모아 있는 것이 그 시대 유행했던 양식이다.

산담의 길이는 전면이 2350, 후면이 2000좌우 측면이 2100이 되고 산담 너비는 190, 높이는 사면 모두 80나 된다.

 

한공지묘 동자석의 모습.
한공지묘 동자석의 모습.

비석에 적힌 벼슬들

아버지는 봉훈랑(奉訓郞)으로 군기시(軍器寺) 판관(判官) 벼슬을 했다. 할아버지는 훈련원 주부(主簿)였고, 증조(曾祖)는 전력부위(展力副尉)로 사복시(司僕寺)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다.

한해보의 어머니는 정의(旌義) 임씨이다.

한해보는 순치(順治) 정유(丁酉, 1657) 57일에 태어나 부인 귀일(貴日) 김씨를 맞아 슬하에 3남을 낳았다.

장남은 세창(世昌), 차남은 세찰(世察), 막내가 세량(世亮)이 있다. 또 측실에게서 낳은 딸 3명이 있다.

본부인 김씨의 생은 순치(順治) 기축(己丑, 1649) 630일에 태어나서 강희(康熙) 갑오(甲午, 1714) 327일에 돌아가시자 동년(1714) 724일에 광생수(光生水)에 장례 지냈다. 공은 5년 후인 강희(康熙) 무술(戊戌, 1718) 3월 초6월에 영면하니 동년(同年, 1718) 826일 합장으로 모셨다.

5개월 지나 장례를 지냈다.

이 비석에는 몇 가지 벼슬이 나오는데 한해보(韓海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아버지는 봉훈랑 군기시 판관 할아버지는 훈련원 주부, 증조는 전력부위로 사복시 소속이라고 새겨졌다.

통정대부는 문관 정3품의 품계로 당상관에 해당한다. 봉훈랑은 문관 벼슬로 종 5품의 품계이다.

군기시 판관은 군기시 소속의 판관으로 종5품에 해당한다. 군기시는 조선시대 관청으로 병기(兵器), 기치(旗幟), 융장(戎裝), 집물(什物) 등을 만드는 일을 했다.

1392(태조 1)에 설치되었는데, 1486(세조 12)에 군기시(軍器寺)로 개칭됐다가 1884(고종 21)에 폐지되고 그 직무는 기기국(機器局)으로 이전됐다.

책임자는 병조판서나 병조참판 중에서 1, 또 무장(武將) 중에서 1명을 선발해 2명의 제조(提調)를 두었다.

그 아래 벼슬로는 정(·3), 부정(副正·3), 첨정(僉正·4), 별좌(別坐·5), 판관(5), 별제(別提, 6), 주부(主簿, 6), 직장(直長·7), 봉사(奉事·8), 부봉사(副奉事·9), 참봉(參奉·9) 등이 있었다.

군기시에는 공장(工匠, 공업기술자)들이 많이 필요하다.

공장은 물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기술자를 말한다.

공장에는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이 있는데, 경공장은 중앙의 각 관사(官司)에 소속된 각종 공장을 말하고, 외공장은 지방 각 관사에 소속된 공장을 말한다.

공장은 명부를 작성해 공조(工曹)와 소속조(所屬曺), 또 해당관사(該當官司)와 그 도(), 고을에 배치하며, 모두 양민과 간혹 공천(公賤)으로 충당하며, 사천(私賤)은 뽑지 않았으며, 나이가 60세가 되면 공장의 역()이 면제되었다.

군기시에 딸린 공장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칠장(漆匠: 각종 器具 등에 옻칠하는 장인) 12, 마조장(磨造匠: 돌이나 쇠붙이를 갈아서 만드는 장인) 12, 궁현장(弓弦匠: 활시위를 만드는 장인) 6, 유칠장(油漆匠: 들기름 칠하는 工人) 2, 주장(鑄匠: 철을 다루는 장인) 20, 생피장(生皮匠: 날가죽을 다루는 장인) 4, 갑장(甲匠: 갑옷을 만드는 장인) 35, 궁인(弓人: 활을 만드는 장인) 90, 시인(矢人: 화살을 만드는 장인) 150, 쟁장(錚匠: 꽹과리를 만드는 장인) 11, 목장(木匠: 나무를 다루는 장인) 4, 야장(冶匠: 대장장이) 130, 연장(鍊匠: 쇠를 단련시키는 장인) 160명 등이었다.

한해보의 할아버지는 훈련원 주부(6)였다.

훈련원은 조선시대 병조에 예속된 관청으로 말 그대로 군사들의 능력을 시험하고 무예를 연마하며 여러 가지 병법서를 익히면서 진영 훈련을 하던 곳이다. 무과의 일을 담당한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해 무관을 뽑았다.

1392(태조 1) 서울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창설해 처음에는 훈련관(訓鍊觀)이라고 부르다가 1467(세조 13)에 훈련원으로 개칭했다.

담당관원은 처음에는 사(使) 1, 군자좨주(軍諮祭酒) 2, 사마(司馬) 2, 참군(參軍) 4, 녹사(錄事) 6명을 두었으나 후에 이를 개정해, 지사(知事·2-타관이 겸임) 1, 도정(都正·3-1명은 타관이 겸임) 2, (·3) 1, 부정(副正·3) 2, 첨정(僉正·4) 12, 판관(5) 18, 주부(主簿·6) 38, 참군(參軍·7) 2, 봉사(奉事·8) 2명과 이 밖에 습득관(習得官) 30명이 있었다.

이들은 병요(兵要)’, ‘무경칠서(武經七書)’, ‘통감(通鑑)’, ‘將鑑’, ‘박의(博議)’, ‘진법(陳法)’, ‘병장설(兵將說)’사어(射御)’를 연구했다.

이들 관원은 무관이 임명됐으나 지사(知事)는 문관으로 임용할 수 있었으며, 1795(정조 19) 첨정판관주부 중의 1명은 문관으로 임명토록 법을 만들었다.

이 훈련원은 인조반정 때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07(융희 1)에는 한일신협약에 따라 해산하면서 훈련원 군인들이 항일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해보의 증조는 벼슬이 전력부위(9)로 사복시(司僕寺) 소속 무관 잡직이었다.

사복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궁궐의 승여(乘輿: 각종 수레와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고려 때 태복시(太僕寺)라고 부르던 것을 1308(충렬왕 34) 사복시로 고쳤다.

1356(공민왕 5)에 태복시로 복구, 1362년에 다시 사복시로 환원했다가 1372년에 사복시로 고쳤다.

조선시대 사복시의 담당관원은 정(3) 1, 부정(3) 1, 첨정(4) 1, 판관(5) 1, 주부(6) 2, 잡직관 마의(馬醫) 안기(鞍騎) 10, 조기(調驥) 1, 이기(理驥) 1, 보기(保驥) 1명 등을 두었다<이홍식·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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