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작은 섬 거센 물결 바라보며, 심정 한번 읊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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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신보
  • 승인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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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읍 소재 어모장군 정형창 무덤…망주석 19~20세기 초 작품으로 추측
동래정씨 28세손 정만석, 마라도 서당 설립…대정현 등 중심으로 학풍 일으켜

다섯 가지 가르침

우리가 흔히 아는 유교의 가족 구분은 옛날 요순(堯舜)시대에 정립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본기(史記本紀)’에 따르면, “요임금은 이름이 방훈이고, 인자함이 하늘과 같았고 그의 지혜는 신과 같았다. 그에게 가까이 가면 태양 같았고 멀리서 보면 구름 같았다. 그는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고귀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았다. 누런색 모자와 검은색 옷에 흰말이 끄는 마차를 탔다. 덕을 따르고 밝혀 9(九族)을 화목하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9족이란 직계 가족의 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족이란 나로부터 위로 4대 조상이고, 아래로는 나로부터 4대 현손까지를 말한다. 이를테면 고조(高祖), 증조(曾祖), (), (), (), (), (), 증손(曾孫), 현손(玄孫)이 바로 9족을 말한다.

또 순임금은 요금의 두 딸에게 예절을 가르치고 순임금에게 다섯 가지 가르침[五典]을 백성들에게 신중하게 펼치도록 했다. 아버지는 위엄이 있고(父義), 어머니는 자애롭고(母慈), 형은 우애롭고(兄友), 동생은 공경하고(悌恭), 자식은 효성스러워야(子孝)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 가지 가르침이 나중에 삼강 오륜(三綱五倫)의 근본이 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 또한 사람이 추구해야 할 기본 덕목으로 인()을 내세웠다. 그는 인()=+=두 사람으로 해석해 인간 됨이란 두 사람과의 관계다라고 했다.

그래서 인()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윗사람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아랫사람과의 관계로 구분한다.

, 윗사람과의 관계는 효(), 이웃과는 수평적인 관계로 제(), 아랫사람과의 관계는 자()로 인식했는 데, 이 효((()의 사회적 도덕 질서가 후에 가족적 도덕 규범이 되었다(금장태·2000).

유교에서의 인간관계는 나아가 가족과 국가의 관계로 확장되는 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바로 가족 관계를 강화하면서 국가를 지탱하게 했던 것이다.

유교의 우주관 또한 가정을 결합시켜 아버지를 하늘이라 하고, 어머니를 땅이라고 하며, 임금을 이의 맏아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맏아들인 임금에게 먼저 충성(忠誠) 하는 것보다는 천지(天地)인 부모에게 먼저 효도를 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이념 또한 이런 가족적 위계질서에서 탄생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형창과 동래 정씨의 사돈 관계

지난 화에서 정형창(鄭亨昌)은 정윤강과 사촌 형제지간이 된다고 했다.

이들은 동래 정씨 17세로, 사실상 제주 입도 4세에 해당한다.

정형창의 무덤은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1030번지 고남수에 있는데 구비석이 없어 자세한 사실을 알기 어렵다.

정형창의 벼슬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고 부인은 한양조씨 사이에 21녀를 두었다.

정형창의 딸은 의금부 도사 고부인 이세번의 큰 며느리가 되었는 데 이충현의 배필이다.

이세번과 석씨 소생으로 이충현(李忠賢)과 이충효(李忠孝)가 있다.

이세번의 큰 아들 이충현은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고 있었다.

이세번이 유배지에서 병으로 위독하자 석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큰 아들은 타계한 아버지를 유배지 가까운 곳인 고산리 자수원(紫水員, 신물) 병좌(丙坐)에 소박하게 묻고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귀경(歸京)하지 않고 대정현에 남아 제주 교수에 임명돼 훈학에 힘썼다.

정형창의 무덤에는 조면암 석물이 있었으나 동자석은 잃어버렸고, 새로 만든 동자석과 옛 망주석만 좌우에 남았는데 망주석의 양식으로 보아 19세기에서 20세기 초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정형창의 큰 아들은 정광침(鄭光沉)이고 배필은 제주 고씨이며, 손자는 정인현(鄭仁賢)이다.

정형창의 둘째 아들은 정광필(鄭光弼)이며 그의 배필은 양천 허씨이다. 정형창의 큰손자 정인현의 딸은 경주인 김대명(金大鳴, 1575~1629)의 첫째 부인이다.

김대명은 헌마공신 김만일의 큰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전해 무공을 세웠고, 1595(선조 38)년 무과에 급제해 전라도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역임했다.

정인현의 아들 정상진(鄭尙眞)의 딸은 김만일의 둘째 아들 김대성의 현손(玄孫)으로 유향좌수(留鄕座首) 김진환(金振煥)의 배필이 된다. 또 입도 7세인 정종지(鄭宗智)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정희현(鄭希賢, 1645~1742)과 작은 아들 정희관(鄭希寬, 1662~1751)이 있다. 정희현은 제주교수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청창욱은 문과에 급제하여 창암찰방을 지냈다.

작은 아들 정희관의 자는 국경(國卿), 벼슬은 문과 급제 후 유곡찰방을 지냈으며 귤림서원장을 지냈다. 후에 품계가 가선대부에 이르렀는데 90세까지 살아 장수를 누렸다. 정희관의 배필은 경주 김씨로 경주인 김반(金磻, 1629~1698)의 딸이다.

김반(金磻)은 김만일의 손자로, 김만일의 셋째 아들이며 초대 산마감목관을 지낸 김대길(金大吉)의 장남이다.

김반은 숙종 2(1675) 전라도 흥덕(興德) 현감(縣監)으로 부임해 이듬 해 5월까지 지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흥덕현(興德縣)은 전라도 나주목의 한 현이다. 본래 백제의 상칠현(上柒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상질현(尙質縣)으로 고쳐서 고부군(古阜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창덕현(昌德縣)으로 고쳐서 고창(高敞)으로써 감무(監務)를 겸하게 하다가, 충렬왕 24년에 흥덕현으로 고쳤다.

정희관은 김반의 딸을 맞음으로써 김반의 근거지인 도의리(道衣里, 제주시 구좌읍 상·하도리)로 이거(移居)했다고 전한다.

동래 정씨 집안은 유독 경주 김씨와의 사돈 관계를 잘 맺었던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 동래정씨는 선조들에게 문기(文氣)와 의기(義氣)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마라도에 서당을 연 정만석

모슬포에서 11km 거리나 되는 거친 섬 마라도에서 훈학을 했던 기록도 있다.

동암(東庵) 정만석(鄭晩錫, 1847~1921)은 한림읍 동명리 출신으로 제주향교 교임을 지냈고, 광무 10(1906)경 마라도에 서당을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래정씨 28세손인 정만석은 학문에 능해 대정, 한경, 한림 지역을 중심으로 학풍을 일으켰는데 1880년부터 1916년까지 36년 동안 대정현을 중심으로 약 10곳에 서당을 개설했다.

그의 저력이 오늘날 제주의 교육 정신을 흠모케 한다.

그의 시 마라도 거센 물결의 감회에 젖어는 한 점 작은 섬에 머무르는 심정을 읊고 있다.

 

봄바람 부는 2월 바다 마을에서

 특별히 서당을 세우니 손님이 이르렀네

 바람이 거세 갈매기 백로 등져 날고

 아이들과 마주앉으니 파도소리 시끄럽구나

 짧은 시간 작은 것도 아껴 마음 속에 새기고

 구슬이 보배이긴 하나 생각 밖에 두어야 하네

 네 가지 큰 근본과 다섯 가지 떳떳한 도리를 아는 것이

 본성을 돈독히 하는 아름다움은 성인의 은혜려니

 

-정만석의 시 마라도 거센 물결의 감회에 젖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