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4.3사건·난징대학살…양민 집단 학살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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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총살·참수·생매장 등
갓난아기 총검으로 찔러 죽여
여성은 나이 가리지 않고 능욕
12초마다 한 명 꼴로 희생돼
 1985년 학살터에 기념관 조성
 천인공노할 만행 세계에 알려
“진정으로 추구하는 건 평화”
난징대학살기념관은 수 천 명의 양민이 매장된 ‘만인갱’(万人坑) 구덩이 위에 1985년 건립돼 집단 학살현장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수 천 명의 양민이 매장된 ‘만인갱’(万人坑) 구덩이 위에 1985년 건립돼 집단 학살현장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70년 전 발생한 제주4·3사건은 도민사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인 약 3만명이 희생됐다.

희생자 중 33%는 저항을 할 수 없었던 어린이·여성·노인이었다.

4·3진상보고서에 따르면 토벌대가 민간인을 학살할 때 만행은 극에 달했다. 총알을 아낀다며 죽창으로 찌르고, 휘발유를 뿌려 산 채로 태우거나, 바다에 수장하기도 했다.

아기를 바위에 패대기치며 죽였고, 주민들이 피신한 동굴에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켰다.

19371213일부터 이듬해 2월까지 6주간 중화민국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역시 야만적이었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를 색출해 양쯔강에 몰아넣어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했다.

종군 특파원은 첫 번째 줄에 있던 포로의 목이 잘리면 두 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에 있던 포로들의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며 살육의 참상을 기록했다.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젊은 청년들도 끌고 가서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젊은 청년들도 끌고 가서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간인 학살도 총살·참수·생매장에 이어 기름을 붓고 총을 쏘거나 얼어붙은 연못에 밀어 넣어 동사하게 했다.

갓난아이를 공중에 던진 후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가 하면 가족을 학살하기 전에 근친상간을 강요하기도 했다.

당시 한 일본군은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며 일기에 남겼다.

일본군 장교 2명은 누가 빨리 100명의 목을 베는 시합을 벌여 일본 현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은 어린이부터 임신부, 70대 노파까지 여성이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능욕을 한 데 있다.

선간후살’(先姦後殺·강간하고 다음에 죽임)이라는 끔직한 범행이 자행됐다.

AP통신 예이츠 맥대니얼 기자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징에 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은 죽어간 중국인, 죽어간 중국인, 오직 죽어간 중국인이었다고 회고했다.

중국 장쑤성 난징시 젠예구에 있는 난징대학살 희생자기념관.

수 천 명의 양민이 매장된 만인갱’(万人坑) 구덩이 위에 1985년 건립된 이곳에는 연간 100만명이 방문하고 있다.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가파인망’(家破人亡·가정은 파괴되고 사람은 죽어간다) 동상은 대학살의 비극을 대변해 주고 있다.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가파인망’(家破人亡·가정은 파괴되고 사람은 죽어간다) 동상은 대학살의 비극을 대변해 주고 있다.

기념관 입구에는 12m 높이의 가파인망’(家破人亡·가정은 파괴되고 사람은 죽어간다) 동상이 서있다.

능욕을 당해 비통함이 극에 달한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컴컴한 공간에서 하얀빛의 이름이 크게 나오다가 점점 사라져간다.

12초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수 십 개의 이름들이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명멸해갔다.

난징대학살 당시 6주간 12초에 한명 꼴로 희생된 것을 비유했다.

이곳을 나오면 ‘300,000’이라고 새겨진 거대한 도서관을 마주하게 된다.

30만명의 희생자 이름을 A~Z까지 책처럼 나열해 개인기록을 보관해 놓았다.

만인갱 암매장터는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존했다. 집단 학살된 유골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일본군 만행 전시실에는 3500여 점의 사진과 33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돼 학살에 관한 증거 사료와 영상, 무기, 관련 모형, 일본군들의 일기를 보여주고 있다.

난징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의 기록까지 꼼꼼히 전시했다.

 

아이가 엄마의 젖을 문채 죽어있다. 1937년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아이가 엄마의 젖을 문채 죽어있다. 1937년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독일 지멘스사() 상하이 지사장이었던 욘 라베는 난징시 서쪽 외곽에 안전구역을 설정, 수많은 중국인들의 목숨을 구했다.

진링여자예술과학대학 학장인 윌헤미나 보트린은 대학을 피난처로 만들어 1만명의 양민을 보호했다.

이들의 헌신과 용기는 동상과 사진으로 남아있다.

전시관을 나오면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기억해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글귀를 마주하게 된다.

기념관 안내를 맡은 김해연 학예사는 난징대학살기념관의 건립 목적은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것이지만,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평화라며 관람객들은 대학살의 실체를 보고나선 마음에 평화를 안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2014년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모일(1213)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각종 기록물과 사진·필름 등 자료는 210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참혹한 인권 유린과 야만적인 광기가 난무했던 학살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어린이들은 어느덧 평균나이가 87세에 다다랐고, 90여 명이 생존해 있다.

기념관은 생존자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가족사진 특별전을 마련했다.

평화와 인권이 소중함과 절실함에 대해 마침표를 찍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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