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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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집 가까이 주민들이 즐겨 찾는 근린공원이 있다. 울창한 소나무와 비자나무 숲에 구불구불 이어진 작은 둘레길,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휴식처이자 쉼터다.

가을로 접어들자 바람도 산산하고 햇빛이 좋아, 공원을 찾는 어르신들이 부쩍 늘었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지팡이를 짚거나, 뒤뚱거리며 쉬엄쉬엄 힘겹게 발을 옮긴다. 불편한 대로 부지런히 거니는 걸 보면서 앞서 지나치기가 조심스럽다. 젊은이들이 잰걸음으로 나를 제치고 갈 때, 착잡한 심정으로 뒤를 쫓아가던 심정이 떠오르곤 한다.

앞으로 다가올 누구나 겪게 될 모습이자,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렇게라도 활동할 수 있다면 고맙게 받아들여야지 다독인다. 줄어드는 근육을 단련하고 실내에서 종일 왕왕거리는 TV와 답답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리라. 가을 햇빛은 보약이라 한다. 노인 한 분은 종아리며 팔을 걷어붙이거나, 아예 엎드려 허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하고 있다. 비타민D가 감기 예방은 물론, 치매나 골다공증 예방에 도움이 된단다. 부지런히 자기 관리를 하는 모습을 무심히 볼 수가 없다.

지난여름이다. 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시선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나무 밑에 운동기구가 설치된 쉼터다. 늘 같은 의자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 노인이다. 며칠은 어디 편찮은가 하고 유심히 살폈다. 더위를 피해 나온 듯, 산책로를 마주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망연히 바라보곤 한다. 세상에 홀로 남은 것처럼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어느 날은 가방을 베개 삼아 곤히 잠들어 있기도 했다. 혼자라는 게 마음이 걸려 운동을 나가면 유심히 살피게 됐다.

유난히 하늘이 맑아 따뜻한 초겨울, 운동장 한쪽이 왁자하다. 노인시설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공원 나들이 나온 모양이다. 나란히 의자에 앉아 해 바라기 하는 모습들이 유치원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다. 주름이 깊게 파인 창백한 얼굴, 몇 올 남지 않은 흰 머리카락, 휑하니 빠진 윗니로 웃는 모습이 하도 해맑아 덩달아 가슴에 온기가 돈다. 삭정이 같은 몸으로 노래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거나 손뼉을 치며 유희를 즐긴다. 한바탕 놀이가 끝나고 서로 부축하며 손잡아 돌아가는 뒷모습, 가랑잎처럼 금방 스러질 것만 같아 눈시울이 아렸다.

숲속을 걷고 나오는 길이다. 하필 분리수거함 곁이다. 해를 받는 야자나무를 의지해, 스티로폼으로 방석 삼아 웅크리고 앉아 졸고 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할머니 어디 편찮으세요?” 하고 말을 걸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여름내 의자를 지키던 그분이다.

아무래도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것 같다. 혼자 사시거나 외로워서 종일 밖으로 나도는 건 아닐까. 정신은 맑아 보이나 선뜻 사정을 물어볼 수도 없다. 감기 들것 같아 걱정돼 어서 집으로 가시라 했더니, 햇빛이 좋아 그런다며 손사래 치는 눈빛이 고단해 단순치 않아 보였다. 상관 말라는 거부의 몸짓, 쉽게 넘을 수 없는 경계의 벽이다. 가족이나 정부, 사회적으로 손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이 이분에게 있을지 모른다. 곁에 소외된 이웃이 없나 눈여겨 살필 시선이 필요한 계절이다. 겨울을 무탈하게 보내고 봄이 오면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기를. 그때는 곁에 말벗이라도 한 사람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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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o 2018-12-26 22:39:46
가슴이 따듯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