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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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영 수필가

어느덧 12, 올해도 다 저물었다.

무술년을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삼백 육십오일을 다 채워간다. 이제 며칠 있으면 2018년도 영원히 세월 속으로 묻힐 터.

올해 여름은 유래 없이 더웠다. 기승을 부리며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무더위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자연의 순리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계절의 순환은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기에.

단풍잎들이 고운 빛깔로 물들어가는 가을이면 으레 나는 몸살을 앓는다. 들녘을 쏘다니며 방랑하던 마음도 성큼 다가선 찬바람에 고운 입새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서운함도 내게는 해마다 겪는 계절병이다.

문득 칠십 년대의 가을 하늘을 회상해본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가 올려다본 하늘은 정녕 맑고 투명했다. 그때는 미세먼지가 뭔지도 몰랐고, 환경오염이 생소했던 시절. 코발트빛 청아한 하늘이 너무 고와서, 푸른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던 그 때의 가을 하늘은 서글프기까지 했었다. 그 시절의 흔적들은 지금도 지울 수가 없어 가끔씩 기억 속에서 꺼내보곤 한다.

아침이면 나는 습관적으로 한라산과 눈 맞춤을 한다. 좋아하는 계절 가을은 그렇게 속절없이 가버렸으나 산은 어느새 머리에 서리를 이고 있다. 흰머리를 풀고 하늘을 향해 동편으로 누워있는 설문대 할망의 고매한 모습. 그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살아있음에 행복을 느낀다.

며칠 전 나는, 내가 낳고 자랐던 서귀포 솔동산 집 바로 앞 커피숍에 앉았다. 그리움이 목울대를 적시며 지난 추억이 성큼 다가왔다. 우리 집 옆집, 또 그 옆집에는 KBS 할망이 살았었다. 며칠 전에도 보았던 그 어른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휑한 바람이 가슴을 훑었다. 서운함에 가슴 시리고 허전하여 눈가에 촉촉함이 서렸다. 예전 방송국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분이 살았던 집은, 변함없는 외관으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어 옛 추억을 그리게 해주었다. 이제는 기억 속 흔적으로만 남아 아쉬움에 망연히 서서 멍하니 빈 집터만 바라보았다. 선뜻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남편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았다. 남편은 가로 세로 몇 발자국씩 걸어 보더니 어림짐작 한 삼십 평 될까 말까 한 집터라고 했다.

내 자식들이 어렸을 때, 그 집에 살던 그 어른은 남편과 사별하고 너 댓 자식을 홀로 건사하며 살았다. 친정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내 어머니를 형님, 형님하며 자주 왕래하곤 했었는데 동네에서는 그를 ‘KBS’ 방송국이라고 불렀다. 그런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그분은 아는 것이 많아 정보통이었다. 대학 교수였던 아들은 몇 년 전 고인이 됐다는 말을 바람결에 들었다. 얼마 후면 이곳을 지켰던 그분의 집터에도 새 건물이 들어서겠지. 콘크리트 벽속으로 숨어버릴 거라 생각하니 새록새록 아쉬움이 더하다. 이제 서귀포 솔동산에 남아 있는 곳은 내 친정집과 바로 옆집인 고영우화백의 집밖에 없다. 어렸을 적 책보자기를 가슴에 안고 골목길 따라 촐랑거리며 학교로 뛰어가던 옛 골목길의 정겨움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호텔이며 아파트가 들어서서 옛 집들은 추억 속에 흔적으로만 남아 맴돌 뿐.

내 친정집은 옛 건물이라 낡고 후졌다. 그래도 내 어머니가 4·3사건 때 불에 타 전소되어 버린 빈 터에 눈물로 지은 집이 아니던가. 친정집이 헐리지 않고 그대로 존립해주길 바람은 시류에 뒤떨어진 아집일까.

지금 내 친정집은 장조카가 살고 있지만, 그 집마저 사라져 버리면 훈훈했던 솔동산의 옛 풍경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묻혀버릴 것 같아 아쉬움이 더해질까 두렵다. 흐르는 시간과 더불어 소박했던 옛 정취들은 세월의 강물에 흘러가 버렸지만, 지친 영혼이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 남은 한 장의 달력에 며칠 남지 않은 무술년을 보내고, 다시 기해년을 맞이하며 세월은 쏜살같이 달린다. 그래도 나는 옛 기억의 흔적을 더듬으며 오늘을 살찌우리라. 정겨웠던 옛 모습은 내 마음속에 흔적으로 각인되어 그것이 상처일망정 옛날을 생각나게 해주는 추억의 장으로 남아 있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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