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속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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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해가 바뀌면 연륜의 탑에 새로 나이 한 살을 더 얹는다. 거스를 수 없는 섭리다.

나이가 더해지며 시간 속에서 덜어내는 하루가 이전 같지 않다. 차를 타면 나이만큼 과속하게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이즈음이다. 오늘이 어제가 되고 어제가 그제가 되는 시간의 영속적 흐름에 가속도까지 붙는다. ‘쏜살같다’란 수사는 완벽한 쾌속의 비유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어 간 데 없다. 잠시 빌려다 머리 위에 불게 했으면. (그래서) 귀밑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한다.”며 늙음을 한탄한 우 탁의 시조 <탄로가>가 떠오른다. 인생은 그렇게 덧없는가.

늘 겪는 일이다. 달력 속에서 바람소리로 흔들어대다 달아나 버린 날들이 얄궂다. 바람 앞에 부대끼고 나면 버텨 섰던 다리가 휘주근하다. 겹겹이 다가오는 고난. 혼곤해 바람에 휘청대다가도 무심결 몸을 일으켜 현실 속으로 놓는다. 우리의 직립 의지는 대단히 강단 있다.

회의(懷疑)는 사람을 몹시 무기력하게 만든다. 자칫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다. 지난밤을 옥죄어 오던 절망감. 하지만 다시 맞는 아침, 떠오르는 해의 서기(瑞氣)를 두 팔 벌려 품는 순간, 어제의 무력감은 풀잎의 이슬로 스러지고 만다. 어느새 능동적이 된 내가 자신을 응시하며 외친다. ‘내 삶의 주체는 나다.’ 어디서 솟는 힘일까. 벌떡 핵심이 일어나고 몸에 불끈 힘이 솟는다. 머릿속으로 빛이 들어 정신이 샘물처럼 맑다. 일이 어렵네, 어쩌네 투덜대다가도 저벅저벅 한 발 앞서 대문을 나선다. 담대한 행보다. 그래선 늘 하던 일상에 매달려 시간 가는 걸 잊는다. 일할 때는 땀이 에너지다.

달랑 한 장, 12월의 달력 앞이다. 이맘때면 으레 입에 오르내리는 말, 하긴 그러고 보니, 지난해도 다사다난했었다. 대놓고 이렇다 할 것도 없는데 그새 세밑이 눈앞에 와 있지 않은가. 또 한 해가 저무는구나. 만감이 교차한다.

섬은 때로 감성이 무디다. 흰 눈이 펑펑 내려야 할 때인데 눈이 쌓일 대지 위로 비가 뿌린다. 검은 겨울비다. 줄줄 기세 좋게 내린다. 마당에 오던 새들 내왕이 뜸한 게 그만한 이유 있었구나. 오가던 길도 비 뿌려 음산하니 쉬이 숲을 빠져 나오지 못할 것 아닌가.

비 추적이더니 12월의 달력에서 갑자기 파돗소리가 난다. 먼 곳을 휘돌아 온 하늬에 물결로 둘둘 말려오는 바다, 고해(苦海). 너울 치는 소리가 악다구니다. 흔들리던 달력의 숫자들이 물결에 쓸려 요동친다. 달력은 시간을 축내며 체중을 덜어내다 제 존재를 한 겹씩 삭제해 왔다. 하루, 이틀, 사나흘…일고여드레…. 그렇게 무조건 방출해 온 터다. 한 장 두 장 뜯어내 허공으로 흩어 버린 숫자의 껍데기들. 그렇게 소실해 간 삶 속의 희로애락 그리고 그것들 위에서 펼쳐 온 내 소소한 서사(敍事)의 기·승·전·결.

시간은 강물로 흐른다. 이제 딱 한 장 남았다. 달력 속 12월은 한 해의 임계점, 끝자락이다. 저기 종점이 보인다. 더 후비어들 시·공간이 없다.

소실점 앞에서 길모퉁이를 돌아야 한다. 새해로 붉은 해가 붕긋 솟고, 벽에 걸린 새 달력 속으로 봄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으리라. 앞산에서 재잘재잘 눈 슬어 내리는 소리 들릴 테다. 12월이 떠나간 자리로 푸드덕 새 한 마리 달력을 차고 날아오를 것이다. 눈 들어, 그 새를 놓치지 마라. 그대의 꿈이요 희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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