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다랑쉬오름 지나 봄볕 쏟아지는 꽃길을 걷다가
한여름 수산리 곰솔·금산공원·방선문서 노래를 부르고
가을 손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 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 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한 해가 눈 깜짝할 새 같다. 겨울비가 조용히 내리는 저녁,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바람난장이 탑동 해변공연장 소공연장으로 찾아든 많은 시민들과 ‘제는 시간들이었다….”고 사회자 연극인 정민자는 회상한다. 지난 난장의 계절별 주요장면의 영상들이 상영된다. 마이크를 휘청거리게 했던 바람, 뜨거웠던 여름,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가을빛, 코끝 시리게 한 겨울을 고스란히 담았다.
제주의 4·3을 소재로 한 봄을 문순자의 시에 고승익 작곡의 ‘다랑쉬 오름’ 창작 가곡이다. ‘누가 이곳에다 불씨 묻어 놓았을까/한밤 중 영문 모르는 채/동굴로 숨어들던 동굴은/다랑쉬 동굴은 못다 부른 다랑쉬 노래’ 이동용 피아노 반주에 테너 한동균이 4·3의 영령들을 노래한다.
소리꾼 은숙이 우리가락으로 ‘봄볕이 쏟아지는 꽃길을 걷는구나/파란 나비 다시 돌아올 테니 나를 잊지 마라….’ ‘꽃길’ 곡으로 한 서린 소리는 우리의 마음 밭을 적셔놓는다. ‘사래밭 아리랑’은 긴 곡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각자의 어머니를 소환시켜놓고, 숨죽여 마주한 어머니와 지난 어느 추억 길을 걸으며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객석의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눈가가 촉촉하다.
제주의 여름, 문순자의 시 ‘파랑주의보’를 김에스더 피아노 반주에 ‘…. 겨울날 분화구가 돌화로로 보이는 것은/수천 평 송당 억새가 항명하듯 젖는 것은/이 땅에 고백을 못한 진눈깨비 저 하얀 죄’ 소프라노 오능희가 열창하자, ‘솥뚜껑 손잡이 같네 오름 위에 돋은 무덤/노루귀 너도바람꽃 얼음새꽃 까치무릇/그런 봄 그런 오후 바람 안 나면 사람이랴’ 오승철의 시 ‘셔?’로 테너 한동균이 화답한다.
음악가 우상임이 아코디언을 들고 ‘왈츠 스위트’, ‘하바나 길라’를 연주한다. 아코디언과 연주가가 하나 되는 순간, 그 리듬에 객석에서도 어느새 하나 되어 몸과 마음이 들썩이고 있다.
이상범의 시 ‘가을 손’을 연극인 강산이 낭독한다. ‘두 손을 펴든 채 가을볕을 받습니다/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빈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난장의 족적 같은 가을이 초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