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달력을 넘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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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 농업인·수필가

신탁(神託)을 확인하는 고대의 제사장(祭司長)처럼, 달력의 첫 장 조심스레 넘긴다. 새해를 알리는 기해(己亥)의 꿀꿀거림. 인쇄잉크 내음새 코끝 알싸하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다도해 섬들처럼 점점이 떠오르는 365개의 날들.

미답(未踏)의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더욱 싱싱한 날것의 시간들이, 서설(瑞雪)처럼 눈앞에 소복하게 쌓여 있다.

, 한 해를 맞는구나.

낯선 시간들 위로, 간담(肝膽)이 서늘해지는 삭풍(朔風) 불어 간다. 순간, 기대와 아쉬움이 밤하늘로 쏘아올린 레이저 빔들처럼 교차한다.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그래도 이 나이까지 살아 남은 것이 축복과 설레임의 섬광(閃光)이라면, 노년의 내리막길을 걷는 자의 무력감과 쓸쓸함은 낙하하는 잔광(殘光)이다.

문득,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아포리즘이 정수리에서 차갑다

눈길 함부로 걷지 마라. 내 발자국 마침내 뒷사람에겐 이정표가 되리니

그렇지 않아도, 갈수록 몸과 발걸음 무겁다. 하긴 그동안 너무 오래 서 있었고, 먼 길 걸어 왔다.

퇴행(退行)을 거듭하는 몸과 마음. 자주 흔들리고 무너지는 자신감과 걸음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혹여 이웃들에게 흉잡히지나 않을까 두고두고 걱정이다. 더구나 구닥다리이라며 노년배(老年輩)들을 얕잡아 보는 젊은이들에게는, 배신감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그리하여, 올해도 잘 살아내어야 할 이유가 자명(自明)해 진다. 문제는, 삶에 대한 치열한 열정이다.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열정과 와인처럼 숙성된 노년의 지혜만이, 여생(餘生)의 삶을 가치있고 품위있게 이끌 것이다.

찾아 보자.

온몸 던져 헤쳐 나왔던 인생의 고샅길마다에, 눈물겨웠던 열정과 지혜의 불씨들. 아직도 소진되지 않고 타고 있을 것이다. 그 열정과 지혜들 그러모아, 삶의 엔진 힘차게 돌리는 구동(驅動)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꼬불꼬불 험한 길에 들어서면, 차멀미를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직접 운전할 때는 운전에 집중하기 때문에, 멀미는 커녕 별 탈 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삶의 여정(旅程)도 다를 바 없다.

노년이 되어 뒷자리로 물러나 앉아, 과속으로 달려 가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찌 멀미를 안 할 수 있겠는가? 늙었다는 핑계로 운전대 포기하고, 자식이나 사회복지정책에 기대어 하루하루 흘려보낸다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무슨 낙()이 있겠는가. 뒷방노인네의 노추(老醜)’만 더께처럼 쌓여갈 것이다.

삶에 멀미가 나고 재미가 없다면, 자성(自醒)해야 한다. 스스로 운전자가 되어,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끌고 가야 한다.

세상의 시선에 지나치게 주눅들지 말고, 젊은이들의 폄하(貶下)도 가끔은 무시해 버리면서, 큰 소리로 일갈(一喝)도 해야 한다.

까불지 마라. 너희들 늙어 봤어? 난 젊어 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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