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그 함성을 되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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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3·1운동 100주년-① 프롤로그-일제강점기 제주와 항일운동
승려와 신도, 민간인 등 참여 전국 최대 무장항일운동
조천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함덕·신촌·서귀포로 확산
극심한 수탈 분노한 해녀들…최대 여성 항일운동으로

2019년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인 3·1운동이 벌어진 지 100주년을 맞이한 해다. 이에 제주新보는 제주지역에서 벌어진 항일운동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제주출신 항일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한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은 일제의 지배 하에서 심각한 수탈과 착취, 민족적 차별은 물론 역사까지 왜곡되는 피해를 입었다.

제주지역 역시 일본과 가까이 위치해 있던 만큼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일제는 1912년부터 도민들을 강제 동원해 해안 일주도로 포장에 나서 1918년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완성된 일주도로는 제주의 각종 산물을 항구로 쉽게 운송할 수 있게 되면서 일제의 제주 수탈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1913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 사업은 국유지와 공유지가 많았던 제주지역에 큰 악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목장토지와 역둔토(역의 경비를 충당하던 역토와 군이 자급자족을 위해 경작하던 둔전을 아우르는 말)를 통해 경작을 하던 화전민들은 토지 조사 사업과 화전 금지로 인해 경작지를 구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활이 더욱 빈곤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활고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은 생계를 위해 제주를 벗어나 일본 등으로 떠났지만 대부분이 탄광이나 방직공장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임금노동자로 전락하는 처지가 됐다.

특히 1920년 여름에는 제주에 4개월이나 콜레라가 창궐, 도민 4134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일제의 심각한 수탈과 빈곤, 차별 등을 견디지 못한 제주도민들은 적극적으로 항거하며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을 비롯해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 제주 3대 항일운동을 비롯한 대대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에 앞서 제주지역에서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제주 최초의 항일운동이자 종교계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이 일으킨 이 운동은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으로 제주3대 항일운동으로 꼽히고 있지만 다른 항일운동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18년 10월 7일 서귀포시 도순동에 위치한 법정사에서 일제의 통치에 반대하던 주지 김연일과 방동화 등 승려들이 법정사의 신도와 선도교도, 민간인 등 400여 명이 집단으로 무장, 2일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으로 민족항일의식으로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항일운동의 여파로 법정사는 일본 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현재는 건물의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다.

또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가담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돼 이 중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어진 재판에서는 31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15명이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18명은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지만 2명은 재판 전 옥사하고 3명은 수감 중 옥사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을 계기로 제주지역에서는 항일정신이 크게 확산됐고, 그 정점을 찍은 것이 1919년 조천만세운동이다.

조천만세운동은 3월 16일 당시 서울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제주로 귀향하면서 구체화됐다.

김장환은 숙부 김시법에게 3·1운동의 상황을 이야기했으며 이를 들은 김시법은 제주에서의 항일운동을 결심, 김시은·김장환을 비롯한 동지들을 규합, 3월 21일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 시위행진을 진행했다.

21일 시작된 조천만세운동은 3월 24일까지 4차례에 걸쳐 진행됐지만 시위 주역들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종료됐다.

하지만 조천만세운동 이후 함덕과 신촌, 신흥 등 인근 지역을 비롯해 서귀포까지 만세운동이 확산되는 등 제주도민들에게 항일과 민족의식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됐다.

1920년대 제주지역에서는 조천만세운동으로 불 붙은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활동이 이어졌고, 이같은 활동들은 1931년 해녀항일운동으로 절정을 이뤘다.

제주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여성운동으로 알려진 해녀항일운동은 일제의 수탈 대상이었던 해녀들이 극심한 횡포를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삶을 지기키 위해 나선 저항에서 시작됐다.

지속적인 수탈과 횡포를 견디지 못한 해녀들은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에 대한 가격 재평가 등을 요구하며 시작된 이 시위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무려 238회에 걸쳐 1만7130명이 참여했다.

하지만 해녀항일운동 이후 그동안 항일운동을 주도해 왔던 청년운동가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그 맥이 단절됐다. 또 지하로 잠적했던 일부 청년운동가들은 혁명적 농민 조합을 건설하는 등 저항에 나섰지만 이 역시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이후 중일전쟁 등이 발발하면서 전시체제로 들어서자 제주도민들은 해방 전까지 징병과 징용, 강제노역 등으로 참혹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제주 항일운동 역사적 의미 등 재고찰 필요”-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 인터뷰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

“제주지역의 항일운동에 대한 특징은 사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데 있다.”

제주지역 항일운동과 제주4·3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 온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제주지역 항일운동의 특징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박 센터장은 “당시 항일운동의 전개는 근대사상의 유입에 따라 시대가 변화하며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며 “당시 왕정체제로는 안된다 해서 공화정 체제가 발돋움 하는 시기였는데 실제 상해임시정부도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로 왕의 나라가 아닌 백성들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박 센터장은 “당시 공화국 체제와 관련된 근대사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렇게 2개의 큰 흐름이 있었는데 제주지역은 사회주의적·무정부주의적 경향이 강했다”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우 그 바탕에 자본과 노동계급이 깔려있어야 하지만 제주는 유림 등의 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약한데다 근본적으로 공동체 정신이 깔려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제주지역은 서울지역을 통해 신사상이 유입되기보다 1920년대 일본 오사카와 직항로가 생기며, 이 곳을 오가는 이들로 인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사상이 곧바로 제주지역으로 유입됐고, 그렇다 보니 제주지역 항일운동은 일본에서 당시 대두되던 사회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게 됐다는 것이 박 센터장의 설명이다.

또 제주지역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는 경향이 강했다.

박 센터장은 “1918년 법정사 항쟁은 경상북도에서 건너온 개혁적·민중적 성향을 갖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고, 1919년 3·1운동 역시 서울 운동에 참여했던 김장환이 계기가 되는 등 외적 계기가 좀 강했다. 제주 항일운동의 특징이 된 사회주의 역시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제주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1996년 제주항일운동사가 만들어진 후 20년 넘게 주춤한 상황이다.

김 센터장은 “당시 정부기록보전소에 있던 판결문과 신문자료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항일운동사로 일종의 교과서 적인 역사편찬이었다”며 “이를 심화시키는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각 사건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깊이 추적하고, 항일운동가 개인에 대한 연구 고찰작업이 후속작업으로 이뤄졌어야 하는데 연구의 맥이 끈기면서 이같는 점이 미진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김 센터장은 “올해로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이미 항일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과 관심 자체가 많이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며 “그런만큼 제대로 된 연구와 함께 앞으로의 연구를 책임지고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를 해 나갈 젊은 학자들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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