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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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현

전화를 받았다. 오래전 성당 주일학교에서 만났던 학생들은 장년인 오십대가 되었어도 가끔 연락해 온다. 그 중에 아직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L은 특별할 뿐 아니라 늘 안부가 궁금하다.

벌써 30여 년 전이다. 나는 교리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어려운 처지 아이들은 항시 있기 마련이다. 능력이 모자라지만 보살펴 주어야 할 학생들이었다. L군은 편모슬하의 가난한 고교생이었다. 시골학교에서 공부는 잘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집을 떠나 인문계 고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총명함이 안쓰러웠던 중학교 담임선생의 적극적 권유로 고교에 입학은 했으나 당장 생활조차 감당이 어려운 처지였다. 그에게 도움이 필요한 형편이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자주 대화도 나누고 그 마음을 열어보려했으나 무척 내성적 학생이어서 어려웠다. 집 형편을 알고 싶었으나 자존심에 흠집이 생길까 하는 염려에 구체적으로 묻기도 조심스러웠다.

차츰 거리를 좁히고 있을 즈음, 추수철이 왔는데 L군 어머니 혼자 고생한다는 말에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혼자 가기는 거북하여 주일학교 학생 두어 명을 추수 일꾼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어머니와 사는 초가엔 방이 하나 밖에 없다는 말에 텐트를 마련하여 마당에서 자면서 주말에 일손을 빌려주겠다고 설득하였다. 아들 학자금에 보태려고 농번기에 혼자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겠다는 마음과, 가정형편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주말에 도착한 중산간 마을은 주민도 많지 않을 뿐더러 추수철이라 마을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L군 안내로 추수할 밭에 가 콩 타작을 도왔다. 석양의 붉은 노을을 보며 집으로 가 씻을 겨를도 없이 마당에 텐트 치고 간단히 저녁 식사했다. 마당에서 올려다보는 높고 맑은 하늘엔 별무리가 그득했다. 오랜만의 농사일이라 피곤했던 터라 이른 시간에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뒷날 새벽녘에 콩 삶는 구수한 냄새에 잠이 깼다.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정성과 손님을 대접하겠다는 마음에 밤새워 손 두부를 만들었지 싶다. 전날 고된 일을 하여 피곤에 절은 몸으로, 쏟아지는 잠을 참아가며 삶은 콩을 맷돌에 갈았을 터이다. 시뻘게진 손은 삶은 콩의 뜨거운 열기를 참아가며 일했을 것임을 짐작케 했다. 빈한한 처지에 대접할 게 마땅치 않아, 뜨거움을 참아가며 밤새웠을 L군 어머니의 퉁퉁 부은 붉은 손은 감사와 사랑의 손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도움이 되겠다고 왔는데, 남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에 면구스러웠다.

뜨끈한 손 두부는 맛있었다. 구수한 콩물에 말아 먹는 보리밥은 어찌나 맛이 있었던지. 그날 먹었던 아침밥은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최고의 성찬으로 기억한다. 정성과 감사의 마음이 빚은 감동의 맛이었다. 대접할 게 마땅찮아서 밤새워 만들었다며 밥상이 시원찮아 미안하다는 말을 어머니는 연신 되뇌었다.

베풂과 대접의 의미를 깊이 돌아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엄혹한 세상살이에 줄 게 없다면 차갑게 언 손을 잡아주거나, 냉가슴 녹여주는 따뜻한 말 한 마디도 힘 든 사람에게 살아갈 힘을 줄 것이다. 도움 준다는 것은 남거나 넘쳐나는 것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나누는 것이지 싶다. 이해와 배려는 곤경 속에 있는 사람에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요즘도 어려운 학생을 만날 때 학업에 도움 될 방법을 고심하게 되는 것은 역시 귀한 것은 사람이라는 소신에서다. 도움이 절박한 학생에게 약간 도움은 꿈과 희망의 불씨를 피워준다. 많은 사람이 귀한 인연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었을 것이다.

형편이 나아진 지금도 L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것이 좋다며 시골생활을 고집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가 나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 어머니에게 마음 빚을 진 느낌이다.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성장한 그가 대견스럽다. 언제 그와 함께 가서 옛날의 손 두부 맛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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