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제주대 NROTC 설치…대학 캠퍼스 통합 이설 부지 마련
(69)제주대 NROTC 설치…대학 캠퍼스 통합 이설 부지 마련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9.0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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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두, 훈학자로 ‘제자 양성’ 
김계륭, 귤림서원장…효자 발굴·장려
김계무, 제주 오호(五虎)…훈련첨정 지내
김계보, 세종 때 제주판관
김계생, 제주축마사
김계용, 제주대학장·제주농업중 교장 등 역임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으로 유명한 옛 제주대학 본관 건물 앞에서 여학생들의 휴식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제주대학교 건물은 현재 제주시 용담동 사대부고 자리에 있었다. 이 사진은 1960년대 초 장시영 원장(당시 장시영산부인과 원장)이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으로 유명한 옛 제주대학 본관 건물 앞에서 여학생들의 휴식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제주대학교 건물은 현재 제주시 용담동 사대부고 자리에 있었다. 이 사진은 1960년대 초 장시영 원장(당시 장시영산부인과 원장)이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계두金桂斗훈학자. 호는 영운瀛雲, 경남 하동 사람으로 혼자 제주에 들어와 한라산의 구름과 같은 방랑객이라고 해 영운이란 호를 불렀다.

본시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해 20여 년 동안 훈학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의 묘소에는 하동 선생이란 묘표만 세워졌다.

문하생 묵농墨農 김종현金鍾炫(1875~1916)은 스승을 평했다.

시로 읊기를 胸中抱得三千卷 海上淹留二十年 老去鄕山頻入夢 晩來衣針愧無得(가슴 속엔 3000권의 책으로 가득, 제주에 머문지 도 20, 늙고서 자주 보는 고향의 꿈, 내내 제자에게 도를 전하지 못할까 걱정하네).”

만년에는 생활이 궁핍한 가운데 슬하에 아무도 없어 문하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연명했다.

본도에서 죽으니 문하생들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다.

김계륭金継隆1632(인조10)~1690(숙종16), 문신. 자 무경茂卿, 본관 광산, 참봉 김진용金晋鎔4남으로 태어나 애월읍 광령리<광낭>에서 살았다.

1663(현종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제주의 귤림서원(현 오현단 자리)의 원장이 되어 후진 육성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글을 많이 읽고 잘 지었으며 1670년 큰 흉년이 들어 노정목사는 그 참상을 알리니 조정에서는 구호곡과 선위어사로 홍문관 부교리 이하李夏를 보냈다.

이후 그는 제주도 유림의 영수로서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위령제를 지내고 효자 열녀를 발굴해 장려하고 과장科場을 베푸니 이때에 김계륭은 아우 김계창金繼敞과 함께 시취돼 전시에 직부, 1671년 문과에 급제했다.

1671(현종12) 제주위유어사 이하李夏가 내도, 시취를 할 때에 제주 유생 김계륭과 김계창金継敞 형제가 함께 급제하여 같은 해 12월에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내렸다.

1673(현종14) 별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이는 아우 계창継敞과 동방급제이다.

전라도 장흥의 벽사찰방碧沙察訪·예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김계무金継武?~1716(숙종42), 무신. 본관 광산, 구좌읍 한동리에서 김내용金乃鎔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제주 오호五虎라 불리던 한 사람. 특히 그의 눈이 호안虎眼같이 무섭게 보인다고 해 그렇게 불렸다.

그는 통칭 범 천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김계무는 1676(숙종2) 유효갑兪孝甲, 한관韓寬, 강덕흥康德興, 고산후高山厚, 유신원兪信元, 김진휘金振輝, 오태현吳泰炫 등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고, 벼슬은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이르고 재기가 뛰어나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아들 김용우金用雨도 사람됨이 걸출해 훈련판관이었다.

김계보金季甫세종 때의 제주판관. 1448(세종30) 5, 오상명吳尙明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450(세종32) 4월에 감찰로 제수되었다.

김계보 재임 당시 14487월 관덕정이 창건되어 군사훈련처로 이용됐다.

문장가 신석조辛碩祚관덕정기를 지었으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김계생金桂生고려 우왕 때의 제주축마사濟州畜馬使.

1375(우왕1) 11, 차현유車玄有의 난으로 관청이 방화됐을 때 제주안무사 임완林完과 제주목사 박윤청朴允淸 등과 함께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김계용金継鏞1918(일제강점기)~1997, 제주대학 학장(1968~1975). 본관은 김해, 대정읍 무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7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후현岐阜縣의 안팔安八농학교를 거쳐 1942년 일본 교토<京都> 고등잠사학교 3학년을 졸업했다.

이후 교토제국대학 농학부 농림생물학과에 들어가 양잠응용 곤충학을 전공했다.

그는 해방 뒤 귀국, 1946년 미 군정청의 발령으로 제주공립농업중학교(6년제) 교유, 교감, 교장직무대리 등을 지냈다.

1947714일 좌우익 갈등으로 학교 내분이 발생하자 교장직무대리였던 김계용은 제주농업중학교는 전부터 사제지간에 미묘한 대립 경로가 있었으나 적극 수습에 노력해 왔다. 이번 내분에 있어도 교내에서 원만한 해결을 보려고 애썼으나 결렬되고 말아 학교에서는 상부에 보고해 상부의 적절한 조치를 바랄 수밖에 없다. 파시즘 교원 규정에 있어서도 그 교사가 부임 10여 일 밖에 안 됐고 그 교사의 교육 이념이 있는 만큼 시일이 경과된 후가 아니면 간단히 규정지을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파면된 교원을 복직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단정적인 발언을 발표했다.

앞서 제농濟農 학생들은 학교당국에 대해 첫째 학생의 퇴학처분을 취소하라. 둘째 파면 당한 선생을 복직시켜라. 셋째 파시즘 교원을 숙청하라며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교내 분규가 일어났다.

194778일에는 2~3학년생은 전원 퇴학원을 제출하고 710일에는 4~5학년생도 후배의 투쟁에 동조하게 되자 김계용 교장직무대리는 앞서 기술한 대로 담화문을 발표한 것이다.

김계용은 1948년 교장 사무취급이 되었다. 모교에서 재임하는 동안 제농濟農 동기 동창생인 교감 황경옥黃京玉(진도)과 서로 공조했으나 좌우 갈등으로 혼란기의 교육 행정을 맡으며 곤욕을 치렀다.

김계용은 1960년 제주도농촌진흥원장을 역임하고 이어 농촌진흥원 잠업시험장을 지냈다.

1952년부터 제주대학 교수를 10년 역임한 경력을 살려 19681월 문종철文鍾哲학장 후임으로 제주대학장에 취임, 8년 동안 재임하면서 해군 제주학도군사교육단(NROTC)을 설치했다.

또한 1969년 대학 동창회에서 모교 캠퍼스 통합추진회를 구성, 19722월 박정희 대통령이 대학 캠퍼스 통합 이설을 연구하도록 지시했고, 197310월 문교부가 성안한 대학이설 개요를 대통령이 재가함에 따라 1975년 말에 통합 이설을 위한 부지 매입을 완료했다.

후일 경상남도 양산梁山실업전문대학장으로 재임한 바 있으며 1997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그는 불교적인 인생관에 침잠, 온후하고 정허靜虛한 생애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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