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산담은 살풍 막는 비보…해 뜨면 양지바른 곳 된다
(107)산담은 살풍 막는 비보…해 뜨면 양지바른 곳 된다
  • 제주신보
  • 승인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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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두악 남쪽 9부 능선에 위치
우람한 산담 4면으로 둘러져
커다란 조면암 향로석이 특징
흰빛 띠며 눈이 볼록한 동자석
영조시대 양식 그대로 투영돼  
우람하게 4면으로 둘러진 산담으로 바람을 막고 있는 숙부인 광주김씨 무덤. 석물로 비석,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 등이 놓여 있다.
우람하게 4면으로 둘러진 산담으로 바람을 막고 있는 숙부인 광주김씨 무덤. 석물로 비석,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 등이 놓여 있다.

산담을 두른 무덤에 앉아있으면 한 겨울 찬 바람이 불어도 포근하다.

그 이유는 무덤을 만들 때 지형과 좌향을 보고 수구(水口)를 살피고 풍살(風殺)을 피하기 때문이다.

산담에 의지해 있으면 그야말로 바람이 폭호다는 것은 들일을 다녀본 사람들이면 다 안다.

폭호다는 것은 바람이 불지 않아 따뜻하다는 말인데 산담에 기대면 바로 바람을 막아줘 따뜻하다는 표현이다. 바람에도 음풍과 양풍이 있다.

음풍이 산(무덤)에 닿으면 혈처(穴處)의 정기가 흩어지고, 양풍은 평지에서 불어오는 데 닿아도 해가 없다.

음풍이란 요풍(凹風)과 같이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말하는 데 이런 바람이 무덤에 들면 혼백이 불안해지기 때문에 자손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한다.

땅의 기운이란 풍즉산(風卽散)이 되기 때문에 땅의 기운이 한 군데 뭉친 곳이란 곧 장풍(藏風)이 잘 된 곳을 말한다.

바로 주산(主山)을 위시해 좌우 청룡·백호, 앞의 안산조산까지 사방이 매몰된 곳 없이 혈처를 잘 감싸줘 살풍(殺風)을 막을 수 있어야 평온하고 생기가 모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주는 지형상, 중국이나 한반도의 지형과는 달라서 명당에 대한 고전적 개념으로 성립되는 곳이 몇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 비보 풍수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산담이 비보의 역할을 하는데 바로 풍살과 허한 방위, 수구(물 흐르는 방향)를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름이나 밭에도 구산(求山: 묘터를 잡는 것)을 하는 것이다.

오름에 올라보면 능선에 산을 쓰는데 만일 산담이 없다면 바람과 물에 노출될 수 있는 지형이 많다.

하지만 산담을 이용해 나름 풍수의 논리를 적용해 나가는 것이 제주 풍수의 현실이었다.

밭에 무덤을 쓸 때도 암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광을 팔 정도만 되면 그것을 이용해 물이 스며들지 않고 빠지도록 한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의 특수성이라고 할까, 한라산 개미목이나 돝트멍 명당은 바로 물의 흐름을 먼저 생각하고 산담을 이용해 지형을 비보로 보완한 것이라면 무리한 억측일까.

 

제주의 미학을 담고 있는 광주김씨 무덤 동자석.
제주의 미학을 담고 있는 광주김씨 무덤 동자석.

광주김씨 무덤

숙부인광주김씨(淑夫人光州金氏) 무덤은 나지막한 오름 돈두악에서 마을 너머로 남쪽으로 한라산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구비(舊碑)에 김씨는 강희(康熙) 15(1676) 병진(丙辰) 215일 태어나 건륭(乾隆) 8(1743) 계해(癸亥) 417일에 돌아가서, 같은 해 1127일 사시(巳時: 9~11)에 장례를 치렀는데 무덤의 방위는 남향(午向)을 하고 있고 위치는 돈두악(敦頭岳)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7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 셈이다.

김씨의 남편은 경주인 김덕형(金德亨)으로 1673년에 태어나 벼슬이 선무랑(宣務郎)이었고, 군자시(軍資寺) 주부(主簿)를 역임해 1726년에 사망하자 신도리 농남봉 자좌(子坐)에 본 부인 군위 오씨와 합장했다.

본 부인 군위 오씨 소생으로는 김하정(金夏鼎)이 있고, 유향좌수를 지냈다.

광주김씨 소생으로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장남 김오정(金五鼎)이 있고, 차남 김응필(金應弼)이 있었으나 응필은 어릴 때 사망했다.

김씨의 큰손자로는 김구가 있다.

오름 위라도 무덤의 좌향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불과 몇 미터 거리라도 겨울 한기가 다르다.

몇 발자국 옮기면 북쪽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북서풍의 영향을 받지만 김씨의 무덤은 거의 정상에 가까운 9부 능선이라서 횡행하게 바람이 불지 않는다.

거기다가 산담이 우람하게 4면으로 둘러져 있어 김씨의 무덤은 해만 비치면 그저 봄날의 양지바른 곳이 돼버린다.

경주 김씨 집안의 산담은 다른 집안의 산담에 비해서 대체로 크고 묵중(默重)하다.

큰 산담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야 가능했다.

첫째 가남이 있어 그만큼 재력이 받쳐주어야 하는데 돌을 나르는 인력을 부릴 수 있는 양식이 있어야 한다.

둘째, 돌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주변 여건이 좋아야 한다.

광주김씨 무덤이 있는 곳은 과거 제주 제1 산방산, 2 걸쇠오름 다음으로 제3의 조면암 비석 산지였기에 돌을 깨거나 주워오기도 쉬워 다른 지역보다 돌을 확보하기가 쉬운 곳이었다.

광주김씨 무덤 안의 석물은 비석, 혼유석, 상석, 향로석, 축판석, 동자석, 토신단이 놓여 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상석과 토신단은 현무암재로 만들었고, 혼유석, 향로석, 축판석, 동자석은 돈두악 조면암으로 만들었다.

특히 향로석은 여느 향로석보다 크고 넓으며, 축판석은 비석 아래에 놓인 것을 보건대, 이는 제사 후에 축문을 사를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동자석은 흰빛을 띠며 서로 마주하며 세월이 무상하게 지나가도 총명한 어린애로 서 있다.

비록 점점 원래의 형태에서 마모되면서 변형되고 있지만 시대양식의 모습은 그대로 품고 있다.

광주김씨의 사망연대가 영조 때이니 정확히 말해 영조시대의 양식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것이다.

눈이 볼록하고 큰 것은 영·정조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오른쪽 동자가 왼손이 위로 올라가고, 왼쪽 동자가 오른 손이 올라가는 형상이다. 그러니까 배위에 두 손을 위 아래로 하여 배례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는 양각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 귀가 실물 같은 모양이다.

산담의 올레는 우측에 있다. 대개의 산담의 올레는 남자 무덤인 경우 왼쪽에, 여자 무덤은 오른쪽에 길을 트는 데, 망자(亡者)의 세계에서는 우상좌하(右上左下)라고 하면서도 이 경우는 왜 생존 시 좌상우하(左上右下)의 원칙을 고수하는지는 알 수 없다.

광주와 광산의 지명

광산(光山)은 광주(光州)의 고려시대 이름이니 광주김씨는 광산김씨의 이칭(異稱)인 셈이다. 광산은 전라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다.

탐라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백제 동성왕 20(498) 8월에 탐라가 공부(貢賦)를 이행치 않는다고 하여 동성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탐라를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까지 내려오니, 이를 듣고 탐라에서는 황급히 사신을 보내 정벌을 그만두게 한 사실(史實)도 보인다.

신라시대에 이르러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경덕왕 16(757)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 6(892)에 견훤(甄萱)이 왕을 칭해 이곳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하기도 했다.

고려 태조 23(940)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고 군현을 정비하면서 무진주를 광주(光州)로 개편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성종 14(995)에 관제개혁 때 해양현(海陽縣) 소속이 되었다가 고종 46(1259) 기주(冀州일명 冀陽州)라 고쳤으며, 충선왕 2년에 다시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돼 공민왕 11(1362)때 무진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공민왕 23(1374)에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광주(光州)는 빈번히 관격(官格)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세종 12(1430)에는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문종 1(1451)에 광주목으로 복구되었고, 또다시 성종 12(1481)에 광산현(光山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연산군 7(1501)에 광주목으로 환원되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인조 2(1624)에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또 10년 뒤인 인조 12(1634)에 광주목으로 복구되기도 했다.

고종 33(1896)에는 전라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