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共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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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갓난이가 옹알이를 한다. 세상으로 내보내는 단순 표현에 무슨 기교라곤 들어 있지 않다. 성스러운 감정덩어리다. 숨 고르다 무심코 입 열고 뱉어내는 거기 티 하나 내려도 흠이 될 완미한 그 순수, 짜장 기분 좋아 새어나온 생명 원초의 음성기호. 감싸 안은 어미 체온에 싸여, 그 어미의 목소리를 감지하고 있다는 첫 인사, 첫 인증이다. 강보에 싸인 어린것이 어미 음색에 귀 세울 줄 알다니 놀랍고도 신기하다.

얼마 지나면 초롱초롱 고운 눈망울에 빛이 고인다. 눈이 별처럼 빛난다. 풀잎 끝 이슬보다 해맑다. 반짝인다. 다이아몬드를 빻아 가루를 부어 넣는다고 저리 빛나랴 싶게 반짝인다. 아기를 깊이 품은 어미 얼굴에 살포시 퍼지는 아침 햇살 같은 미소. 방안에 남실대는 배냇냄새. 어미와 아기는 떼려야 뗄 수 없게 한 몸으로 부둥켜안는다. 공감이다. 공감은 벅차고 따스하고 포근하다.

공감은 대상 속으로 스미는 것, 그건 소름으로 돋아난다. 끝내 마음자리로 스며들어 함께 뜨고 가라앉는다. 감정이입이다. 종당엔 뜨겁게 다가가는 길이다.

직감만으론 되지 않는다. 거기다 상상을 얹을 때 돌기처럼 싱싱하게 일어나는 울림이 공감이다. 자아를 넘어 조장되는 맹렬한 감정의 충돌 현상이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강렬해지는 그것은 마치 고사리 손이 사금파리 두 쪽을 쳐 내는 빛과 흡사하다. 어둠 속의 선명한 존재감, 그 빛은 오밤중이라 작아도 날빛이다.

눈이 눈을 맞추고 가슴이 가슴을 건드릴 때 요동치는 감동의 너울은 때로 주체하기 힘들다. 가슴을 팔딱이게 한다. 좀 더 끌어올려 놓고선 감정의 극한에서 울컥울컥 쾌감에 내몰리기도 한다. 포식한 일이 없는데 포만하다. 작은 어선 몇 척 촐랑대고 있을 만조의 고향 포구, 그 한적한 정경이 떠오른다. 긴장에서 달아난 이완은 행복감을 안긴다. 공감의 효과다. 그것엔 분명 현실을 신나고 생광하게 하는 힘이 있다.

겨울엔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잔디마당을 거닐다 문득 멈춰 섰다. 모퉁이 작은 소국 숲에 가 있는 눈길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한때 무덕무덕 피었던 샛노란 꽃들이 하늬에 졌고, 구겨져 잎은 추레하고, 까맣게 말라비틀어진 줄기. 밤낮 바람에 저항했던 흔적만으로 작은 생명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검불이 된 소국을 낫으로 베어 내려 다가앉다 소스라쳤다. 개체가 뿌리박은 곳곳에서 새싹이 새파랗게 솟아나고 있잖은가. 소국은 죽지 않았다. 죽은 것에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생과 사가 과거와 현재로 극명히 선을 그으면서 진행 중인 세대교체의 현장. 그만 말이 막혔다. 생명처럼 숭고한 것은 없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은 네뿐인가 한다”고 찬탄한 옛시조를 떠올리는 순간, 찬바람에 코끝이 아리다.

소국은 시종 침묵 모드다. 흔하디흔한 말 한마디 않고 실행으로 보여 주고 있다. 연기하는 게 아니다. 혹한에도 생존에 대한 갈망으로 잎을 피워 올려 파랗다. 시들어 나달대는 마른 잎과 새잎의 교감을 보며 가슴 뭉클했다. 쏴아, 이미 명을 놓은 묵은 것과 명을 잇는 새 것 사이에 출렁이는 공감의 물결이 와락 내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나는 크게 공감했다. 소국 새싹 위로 무엇이 어른거리더니 금세 맑은 소리 들린다. 갓난이 옹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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