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고향을 물으면 제주라 답하고 신풍리 초가 그리워진다”
(70)“고향을 물으면 제주라 답하고 신풍리 초가 그리워진다”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9.01.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계중, 임금 특명에 6품직 승제
김계창, 성균관 전적 등 역임해 
김계흥, 남학 교수·사헌부 감찰
김관옥, 동부서 부지 확보 공로
김공천, ‘한라의 바람노래’ 집필
1948년 4월 제주4·3사건 발발 직후 제주여자중학교 2학년 3반 학생들이 교정 모퉁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4·3 와중 휴교가 잦고 수업 결손도 많아, 학교 수업이 없을 때에는 삼성혈에 가서 임시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필명 감밭, 시조시인 김공천은 제주여중 교장, 제주여고 교장 등 17년 동안 교직생활을 보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48년 4월 제주4·3사건 발발 직후 제주여자중학교 2학년 3반 학생들이 교정 모퉁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4·3 와중 휴교가 잦고 수업 결손도 많아, 학교 수업이 없을 때에는 삼성혈에 가서 임시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필명 감밭, 시조시인 김공천은 제주여중 교장, 제주여고 교장 등 17년 동안 교직생활을 보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계중金繼重문신. 정의현감. 본관 광산, 제주에서 태어났다.

김치용金致鎔의 아들이며 전적 김계흥金繼興의 아우이다.

1710(숙종 36) 전라우도감진어사全羅右道監賑御史 홍석보洪錫輔가 내도해 과장科場을 개설, 문과에 김계중 1명을 시취했다.

김계중은 1739(영조15) 문과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 벼슬은 전적에 이르렀다.

1823(순조 23) 3월 구영석具齡錫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도임하고 18255월 대정 객사 변괴사건으로 파직돼 떠났다.

17399월 제주에서 직부直赴4명 중에 김계중의 나이는 77세였다.

임금은 그가 연로하니 특명으로 사제賜第했다. 멀리 절해絕海에 있으므로 제주 문과 급제인 김계중에게 6품직을 승제陞除해 보내었다.

김계창金継敞1637(인조15)~1699(숙종25), 문신. 성균관 전적, 본관은 광산, 제주시 봉개리<봉아름> 명도암에서 참봉 김진용金晋鎔6남으로 태어났다.

처조부는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본관 김녕)이며 처부는 감목관 김대길金大吉이다.

1671(현종12) 제주위유어사 이하李夏가 내도, 시취할 때에 그는 그의 친형 김계륭金継隆과 함께 급제해 전시殿試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친형 계륭은 전남 장흥군 벽사찰방碧沙察訪이 되고 그는 성균관 전적으로 나아갔다.

김계흥金継興1647(인조25)~1701(숙종27), 문신. 사헌부 감찰監察, 자는 성경盛卿, 본관은 광산이며 김치용金致鎔의 아들로 한동에서 태어나 구좌읍 세화리에서 살았다.

그는 글을 잘 짓고 또한 글씨로도 유명하며 후일 남학南學의 교수로서 훈학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75(숙종1) 제주순무어사 이선李選이 내도, 같은 해 3월 과장을 베풀어 문과에 고기종高起宗(한동) 등 제주 유생 4명이 급제할 때에 그도 포함돼 전시에 나갈 수 있게 됐다.

그는 1676(숙종2) 전시문과에서 병과로 고기종과 함께 급제해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다.

필자의 변 : 김계흥이 죽은 후 후손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졌고 오래 모셔 왔으며, 세월이 흘러 그 사당이 없어지자 후손 김상호金相浩(세화)의 주창에 의해 193410월 그 자리에 방계 후손 김석익金錫翼(제주-성안)이 지은 통훈대부사헌부감찰 겸 남학교수 김공사당유허비祠堂遺墟碑가 사손嗣孫 김중배金中培(세화)를 중심으로 후손들의 뜻을 모아 세워졌는데 현재 구좌읍 세화리에 남아 있다.

김관옥金琯玉1928(일제강점기)~2013, 서예가, 경찰서장, 한시漢詩 작가로서 영주음사瀛洲吟社 사장.

아호는 만경晩耕 혹은 석암石庵, 우석헌于石軒. 김관옥은 나주김씨 인충공파 김계호金桂浩의 장남으로 애월읍 납읍리<과납>에서 태어났다.

김관옥은 1982년 말부터 제주경찰국 경비과장, 수사과장, 정보과장, 경무과장을 두루 거쳤다.

19853월부터 19867월까지 제39대 제주경찰서장을 역임하면서 김관옥은 제주경찰이 향후 100년간 사용할 수 있는 부지 확보를 위해 제주도와의 지속적인 협의와 설득을 통해 당시 공원公園 부지였던 현재 제주동부경찰서 부지 29700를 넘겨받았다.

이후 용도변경을 통해 신청사新廳舍 건립 사업을 추진했다.

김관옥은 1924년에 결성된 한시동인회인 영주음사의 회원으로 시작해 1990년부터 2000년까지 회장을 지내고, 시조창 명인으로 후진양성과 민족문화 보존保存에 헌신했다.

저서로 한시강좌5, 한시집 만경집우석헌집이 있다.

김공천金功千1922(일제강점기)~1987 교육자. 중등·고등 교장, 시조時調시인. 필명 감밭(柿田), 본관은 경주.

김공천은 성산읍 신풍리<-내끼>에서 태어나 1929년 여덟 살에 도일渡日, 1930년 오사카<大阪>의 초등학교를 마치고, 오사카의 3대 명문 중학교인 이마미야今宮 중학교에 입학했다.

감밭은 이마미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학교에서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종용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명문 7개 고등학교를 나와야 제국대학교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병약과 중일전쟁中日戰爭으로 경제사정이 어려워 19413월 중학교 5년을 졸업하면서 진학을 포기하고 오사카시청 토목과 서기로 취업, 야간夜間부가 병설된 간사이<關西>대학 전문부에 들어갔다.

1948815일 정부가 수립되고 이듬해 그는 경남 남해南海공립농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어 그의 꿈은 성취됐다.

영어 교육을 맡아 실력은 넘쳤으나 우리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스스로 안타까워했다.

영어교사로 제주 교직에 첫발을 내딛는 1960년대 말 제주일고 교감을 거쳐 서귀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때마침 제주여자학원에서 초빙招聘을 받아 처음 제주여중 교장을 지냈다.

이어 제주여고 교장까지 도합 17년 동안 보람 있는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1969년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중학생의 TOP학습법고교생의 과학적학습법등 두 권의 책을 번역하여 자비로 출간했으나 본도 교육계의 무관심으로 두루 햇볕을 보지 못했다.

감밭은 일본의 고유한 와카<和歌>’에 능해 교토에 있는 풍일지의 동인同人으로서 늘 와카를 보냈고 그의 작품 63나 게재됐다.

김공천 시조집 ‘한라의 바람노래’
김공천 시조집 ‘한라의 바람노래’

그가 격동기에 살았던 자신을 표현한 한라의 바람노래는 서울로, 일본으로 길이 멀리 울려 퍼졌다.

중앙의 시조시인 월하 이태극李泰極탐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교단에 선 지 40星霜 이제 정년을 맞아 늦게나마 시조들을 모아 한라의 바람노래를 엮어내게 됐다. 젊었을 때에는 일본의 고유시인 와카를 지어 상당한 경지에 이르기도 한 시재詩才를 갖춘 분으로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로 뜻을 세워 지은 지 얼마 안 되나 근엄하고도 열띤 수련으로 이 역시 상당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했다.

시조집 한라의 바람노래서문 중 서울 어느 거리에서 누가 고향을 물으면 나는 제주라 답하고 신풍新豊리 초가 그리워진다.”는 시조집 한라의 바람노래1편이다.

그는 1986한라의 바람노래의 발간을 마쳤고 19872월 제주여자학원에서 정년퇴임했다. 동년 105일 향년 65세로 인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