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청년의 시간은 앞만 보고, 노년의 시간은 뒤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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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 자는 등이 구부정하고 지팡이 짚은 노인 모습…노련·원로 등 긍정적 의미도 있어  
제사는 기일에 고인을 기억하는 의식…아는 사람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가족을 위로해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사진은 친인척들이 모여 묘 이설 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모습.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사진은 친인척들이 모여 묘 이설 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모습.

"어째서 오늘의 내 생각은 젊은 날의 내 생각이 아닌가? 어째서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내 양 볼은 어째서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는가?"

변화, 늙음()과 죽음()

흔히들 서양 최초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B.C.485년경~B.C.444년 추정)인간사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같은 사람들이 늘 행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라고 했다.

당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었고 또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의 생마저 예측할 수 없었던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말한 것이리라.

또 신비주의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流轉) 한다는 학설로 회자되지만, 그는 불을 근본 실체로 생각해, 만물은 불속의 불꽃처럼 다른 존재가 죽음으로써 탄생한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죽어야 할 자는 불멸자이고, 불멸자는 죽어야 할 자이다. 한 존재는 다른 존재가 죽음으로써 살고 다른 존재를 살림으로써 죽으리라.”

우리 세계의 영원이나 불멸이란 없다. 세계(우주)의 속성은 변화일 뿐 우리 존재는 이 세상에 잠깐 몸을 빌려 왔다가 다시 무엇인가의 기로 변해간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서경덕(徐敬德)의 태허일기(太虛一氣)를 떠올리는데, 우주의 기는 없어지지 않으며, 그 기의 열림과 닫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해서 사물이 형성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 기는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원인과 계기를 내포하고 있어서 기틀이 그러하고(機自爾), 스스로 할 수 있으며(自能爾),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다(自不得不爾)’는 것이다.

서경덕은 이러한 기의 변화 과정의 규칙성을 리()라 했고, 우주의 질서는 태허의 기가 모이고 흩어져 드러나는 사건과 같은 것으로, 주재()는 현상의 내적 변화일 뿐이라는 것이다(남지만·2001).

청년의 시간은 앞만을 보고 가고, 노년의 시간은 뒤만을 보며 간다.

그렇다. 살날이 많은 세대는 삶만을 보고 앞으로 간다.

그러나 살날보다 죽음의 날이 가까웠다고 생각하는 노년의 세대는 마음이 조급하다.

그 조급함을 인식시키고 재촉하는 것이 바로 늙음이다.

그래서 조바심을 극복하라고 위로하듯이 베네치아 시인 호라티우스는 매일매일 마지막 날로 생각하라. 그러면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들로 충만해짐을 느낄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났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는 갑골문에서 머리를 길게 기른 노인의 모습이다.

어떤 때는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어 몸의 기력이 약하다는 것을 표시한다.

자는 등이 구부정하고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하여 손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모습을 상형했다.

본래의 뜻은 나이가 많다이다. 그러나 뜻이 확장돼 지나온 세월이 오래됐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면서, 낡아빠짐[老朽], 약함[老衰]처럼 부정적인 의미들이 있지만 그래도 능숙한[老鍊], 원로[元老]라는 의미에서 보듯, 지혜(知慧), 경륜(經綸)의 긍정적 의미도 있다.

자는 금문(金文) 시대가 오면 분화되어 두 글자가 된다. 자는 본래 늙다라는 의미의 자와 같으나, 지팡이를 잡은 방향이 달라서 자로 나뉘게 되었다.

자는 말 그대로 노인이고, 자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말한다.

는 때린다는 뜻도 있어서 아마 노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였던 먼 상고시대 습속과도 관련이 있다.

그 상고시대에는 현실적 삶이 어려워 연약한 노인을 때려죽이는 노인 살해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는 제사 때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고찰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인생은 온통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꽉 차있다. 결국 혼자인 자신의 걱정은, 곁에 있는 생로병사, 특히 죽는다는 사실이 가장 큰 걱정이요. 옆에 있는 가족 자녀에 대한 걱정이 다음이다.

몽테뉴(Montaigne. Michel De, 1533~1592)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죽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걱정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삶에 대한 걱정은 우리에게 공포를 준다. ()죽는 법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 자연이 충분히 알아서 잘 가르쳐 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공연히 속 썩을 필요는 없다.”

()다한다라는 뜻으로 사람이 떠나는 것이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死人)을 돌아간 사람(歸人)라고 하여, 사람이 돌아갈 바를 귀()라 했다(人所歸爲鬼). ‘이아(爾雅)’, 는 돌아간다()는 말이 있고, ‘예기(禮記)’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라고 했다.

()은 양()이고, ()는 음()이며, [드러나다] 하고, [은밀하다] 하다. 그래서 귀신은 음과 양이 조화이고, 드러났다가 숨어있는 기운의 변화이다.

그래서 귀신은 돌아갈 바가 있으므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는데조상 제사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게 한다.

 

‘시간은 늙음의 법칙’을 표현한 사진. 출처=岡本太郎の沖繩, 오키나와·1992
‘시간은 늙음의 법칙’을 표현한 사진. 출처=岡本太郎の沖繩, 오키나와·1992

제사, 아는 이 잊지 않기 위한 존중

제사는 한 솥밥을 먹던 사람들끼리의 예의의 형식이다.

현실에서도 아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과 같은데 부모·형제·자매 죽음에서 기일(忌日)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제사는 아는 사람을 기억하는 행위로 죽음을 기억하고 아는 사람끼리 서로 위로하는 것이다.

라는 글자는 늘어놓다()는 뜻으로, 침상에 모시게 되면 시체()라 하고 죽은 자를 말한다.

죽었기 때문에 는 신의 형상이 되며, 그래서 제사에서는 신주(神主)가 된다.

조상이 죽으면 조상신으로 모시는 것과 같다. 예삿날에는 시동(尸童)이라고 하여 어린아이를 제사에 모셔 신으로 여겼다.

()의 본래의 뜻은 제사 지내다이다. “희생물을 바쳐 귀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을 말한다.

귀신이란 죽은 사람 또는 만물의 정령을 말한다.

글자의 모습은 한 손으로 고기를 잡아 제단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다.

갑골문에는 제단()은 없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이다.

() 또한 제단 앞에 사람이 꿇어앉아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다.

본래의 뜻은 신령이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다이다. 이렇듯 사람이 죽으면 그를 아쉬워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위로하는 것이다. 이런 의례는 공동체 결속에 신뢰를 더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조()는 위문하다. 조의를 표하는 글자가 된다.

는 원래 사람 인()자와 활궁()자를 합한 글자였다.

상고시대에는 시체를 땅속에 매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들이 모여들어 시체를 파먹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가족이나 지인(知人)들이 활을 가지고 시신의 새를 쫓았다는 뜻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그래서 이 글자는 상()을 당한 사람을 조상(弔喪) 한다는 뜻이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데에도 쓰고 곤란한 일을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위로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이민수·2015).

제사 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제사를 피한다.

예기(禮記)’, 오늘날의 제사를 불 보듯이, “제사란 자주 함을 원하지 않으니 자주 하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공경할 수 없게 된다. 또 제사는 소홀히 함을 원하지 않으니 소홀히 할 때는 게을러지고, 게을러지면 잊게 된다.”라고 경각심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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