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제 암흑기 시절부터 ‘100년 역사 흔적’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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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5월 10일 개교…건물양식 잘 보존돼 ‘문화유산 가치 충분’
설립·운영 어려움 있었지만, 김인배·신창진 등 독립운동가 다수 배출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100번지에 위치한 구좌중앙초등학교 석조건물. 1923년 설립된 가운데 건물 외관의 석조양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100번지에 위치한 구좌중앙초등학교 석조건물. 1923년 설립된 가운데 건물 외관의 석조양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아름다운 해안길과 고즈넉한 밭담이 주를 이루며 아직은 제주스러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시 구좌읍.

이곳에 역사가 깊은 옛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100번지에 위치한 구좌중앙초등학교 석조건물이다.

언뜻 보기에 일반 초등학교처럼 보이지만 구좌중앙초등학교 본관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위치한 석조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역사와 전통이 오랜 건물이다.

100년 가까이 건물 외관의 석조양식을 그대로 유지한 이 곳은 문화유산으로서 지정할 만한 가치가 크다.

건축양식이 그대로 보존됐다는 것도 의미가 크지만, 이 곳을 졸업한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가가 배출됐기 때문이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구좌중앙초등학교를 들여다 본다.

구좌면의 역사

일제강점기 시절 구좌면(당시 행정구역상 주소) 소재 주민들은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이에 따라 구좌면에서는 한문을 위주로 가르치던 서당교육 외에도 한자와 신학문을 병행해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학사가 설립됐고 월정리와 행원리에도 진명학사와 영신학사가 설립됐다.

학술연구자료에 따르면 구좌읍에서 해녀항일운동이 시작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해녀들이 학문을 배우고자 했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학연구센터 주관으로 열린 제주해녀 유산의 다층성과 보전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도 조성윤 제주대 교수는 해녀 항일운동에 대해 해녀의 강인하면서도 결속력 있는 공동체 문화가 항일운동의 근간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야학으로 스스로 공부를 시작하며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다고 말했다.

이들은 배움을 통해 일제 수탈에 대항했던 것이다.

이처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곳곳에서 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시도가 일어났다.

특히 1908년 구좌면 제2대 면장인 이원화는 당시 서당에서 한문 교육을 주로 했던 교육방침을 개선하고 국어와 산술 등 신학문을 교육하는 2년제 면학교를 행원리에 설립해 운영했다.

운영비는 마을에서 부담했지만, 머리를 깎아 입학하는 것을 꺼려 입학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고 운영비 조달에 어려움이 있어 2회의 수료생을 배출하고 폐교됐다.

구좌중앙초등학교 설립되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황국식민화 교육을 강화하면서 192224일 칙어 제19호로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는데 11교 개설을 원칙으로 했다.

이때 각 읍면마다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월정리와 행원리에서도 당시 제주도 행정주임 김진석, 제주경찰서 순사부장 홍순표 두 명이 중심이 돼 월정리에 학교를 설립하고자 추진했지만 1923년 김녕리가 먼저 공립학교 설립 인가를 받게 되면서 사립학교로 추진하게 됐다.

이게 바로 지금의 구좌중앙초등학교다.

1923914년제 사립 중앙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24510일 개교했다.

개교 당시(4년제) 실시된 교육으로는 산수, 국어(일본어), 조선어, 일본역사, 지리, 화도, 창가, 체조, 가사재봉 등이었다.

19305306년제로 됐고, 1938331일 사립중앙심상소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이후부터 황국신민화 및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교수 용어를 일본어로만 가르치도록 했다.

19413월에는 사립중앙학교로, 19463월 에는 구좌중앙공립국민학교로, 19505월에는 구좌중앙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이곳은 195812304개 교실과 현관, 승강구를 신축(석조, 슬레이트 1)했으며 이어서 19611303개 교실과 승강구를 증축해(석조, 슬레이트 1) 7개 교실과 현관, 2곳의 승강구를 갖췄다.

199110253개 교실을 부분 철거했고 나머지 4개 교실 규모는 1993년에 개수해 급식실과 과학실로 사용되고 있다.

지붕과 유리창, 내부구조 등이 바뀌었지만 벽은 석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

구좌중앙초등학교 관계자는 석조건물에 대한 역사를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일제강점기 십시일반으로 학교를 세우고, 이곳에서 공부했던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고 했다.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다

구좌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들이 몇몇 있다.

1회 졸업생인 김인배는 독립운동을 하다 1930년 징역 5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 옥사했다.

2회 졸업생인 신창진은 제주농업학교 학생 제1차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1934년 졸업한 안치현은 일본 가라후도의 탄광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펀치볼 전투의 영웅 고태문 중위도 1941년 구좌중앙국민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세운 이들

제주교육박물관이 집필한 우리학교 공덕비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에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는 데, 마을주민 김인수씨가 자신의 토지에서 나온 목재를 건네며 학교 건물을 지을 때 도움을 줬다고 한다.

188215일 월정리에서 태어난 박성일씨는 학교 설립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1936년 학교유지회장을 역임해 학교 설립 과정에서만 노력하지 않고 설립 후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82226일 행원리에서 태어난 홍순중씨는 학교 설립 당시 설립자금의 많은 부분을 기부해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둘째 아들의 자녀들이 학교와 인연이 있는데, 큰딸 석희(1930년생)는 교사로 재직했고, 아들 승대는 제29회 졸업생으로 고향에 살면서 학교운영위원장을 지내며 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김성률씨도 학교 설립자 중 한사람이다. 한천산업(寒天産業)으로 큰 돈을 벌자 학교 설립뿐만 아니라 1936년 마을에 있는 중앙보통학교의 2대 후원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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