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감성과 상상력은 법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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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시인·수필가/前 애월문학회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슬픈 절규를 보면서 법(法)의 역할에 의문을 갖게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 등 소외계층의 아픔을 최대한으로 덜어주는 것, 그게 법의 바른 의무이고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 법은 소외계층, 약자에게 더욱 옥죄는 족쇄가 되고 있다.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알량한 허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법과 문학을 결합하는 데 있으며, 법의 눈과 귀는 불행을 겪는 사람의 눈물과 한숨을 돌볼 수 있어야만 법의 생명이다.

문학의 위대한 작품들은 법을 떼 놓고 문학만으로 읽어서는 총체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법과 문학은 본시 한 뿌리에서 생성된 것이다. 법과 문학도 소재는 동일하다. 즉, 인간의 공동생활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다룬다. 문학은 갈등을 제기하고 법은 이를 푸는 데 주력할 뿐이다. 문학은 흔히 소수자의 처지에서 세상살이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법은 다수의 관점에서 세상의 질서를 챙긴다고 본다. 문학이 개인의 창의에 의존한다면, 법은 사회의 보편적 윤리에 기댄다. 그래서 시인은 법률가의 눈으로 보면 상식과 보편적 윤리를 팽개친 일탈자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인권은 소수자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아우성이다. 문학의 본질도 그렇다.

법에는 제도의 힘이 따른다. 그 힘은 다수의 이익을 지킨다. 그래서 소수는 법에 원한을 품는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은 새로 건설한 대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선언한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법의 임무’라고. 강자의 팔뚝과 부자의 돈지갑이 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숨통을 조이지 못하도록 마련한 안전판이 법이다. 시대 변화에 둔감하고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정체된 법은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문학의 손이 장래를 가리키면 법의 눈도 따라서 주목해야 한다. 법에 문학적 감성과 상상력으로 우리 사회를 보듬어야 한다. 문학적 상상력이 법의 경직성을 극복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회정의가 설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기독교문화권에서 대대손손 사랑받는 작품이다. 금전 거래의 당사자가 자유 의사로 합의한 인육계약이다. 계약서대로 집행할 것을 주장하는 샤일록, 목숨이 위태로운 상인 안토니오를 판관 포셔의 창의적인 해석이 그를 살려낸다. ‘살을 가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실로 명판결이다. 우리나라의 사법사에도 명판결, 명변론이 적지 않다. 1980년대의 인권변호사 조영래는 창의적인 소송과 변론으로 세상을 크게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망원동 수재민의 집단소송,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등 업적이 지대하다. 경직된 법에 문학적 상상력을 입힌 선구자이다. 지난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에서 검찰은 언론을 앞세워 기소전 피의사실 공표 등 적폐청산에 그치지 않고 피의자를 철저하게 파멸시키려 든다. 자의(恣意)이자 불의(不義)다. 제도가 경직된 나라일수록 법도 문학도 창의적인 상상력 발상이 절실하다. 문학의 감성과 창의적 상상력은 법의 생명이다. 성숙한 사회는 법과 문학이 함께 아우르는 세상이라야만 진정 사람이 살맛나는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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