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제주 첫 무력 항일투쟁…국권 수호 위한 의지 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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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고사훈 필두로 10인 ‘항일 비밀결사’ 조직
의병 규합·출병 준비했으나 일경 습격에 활동 좌절
훗날 제주지역 항일운동 기틀 다지는 데 큰 기여
1977년 제주시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건립된 ‘의병항쟁기념탑’의 모습.
1977년 제주시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건립된 ‘의병항쟁기념탑’의 모습.

제주지역 의병 규합=의병이란 나라가 위급할 때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싸움에 목숨을 바친 이들이다.

19077월 고종이 퇴위당하고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국권회복을 외치며 의병으로 나서게 된다.

당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 활동은 제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제주의병항쟁이다.

제주의병항쟁은 1909225일 제주군 중면 광양동 조병생의 집에서 제주의 젊은이들이 항일 비밀결사 모임을 갖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날 모임에는 우국충정이 남달랐던 고사훈을 필두로 김만석과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조병상, 김재돌, 양남석, 양만평, 한영근 등 모두 10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나라를 강탈하려는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내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한다. 당시 이들이 작성하고 의병 모집 당시 발표한 격문에는 간결하면서 크나큰 애국충정이 흘러 넘쳤다.

고사훈 제주의병항쟁 의병장.
고사훈 제주의병항쟁 의병장.

이들 10명의 애국지사는 고사훈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33일 관덕정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의병장 고사훈 등 6명은 대정군 영락리와 신평리를 중심으로, 이중심을 비롯한 4명은 제주도 중면을 중심으로 의병 규합에 나선다.

고사훈 등 애국지사들이 돌린 격문과 통고서를 접한 도민들도 이들의 의거에 고무돼 적극 참여하면서 대정의 영락리와 신평리에서만 각각 100명의 의병이 규합됐다.

또 두모리에서는 이장 김재형이 중심이 돼 출병준비를 갖춰나갔고, 대흘리는 물론 송당과 교래리 등에서 모병활동이 추진되는 등 거의 전도적인 모병활동이 이뤄지게 됐다.

하지만 이들의 의거는 의병장 고사훈이 불시에 체포되면서 거병 직전 위기를 맞게 된다.

대정군에서 의병을 규합해 관덕정으로 향하던 고사훈 일행은 거사 이틀 전인 31일 대정군 중면 광천리(현재 안덕면 동광리 일대)에서 경찰의 급습을 받게 된다.

당시 제대로 된 무장조차 하지 못한 의병대는 급습을 피해 산산히 흩어지게 됐고, 이 과정에서 의병장 고사훈과 김만석이 체포됐다.

 

현재 대전 유성구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돼 있는 고사훈 지사묘.
현재 대전 유성구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돼 있는 고사훈 지사묘.

항일투쟁 기틀 마련=일본경찰은 고사훈과 김만석을 회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이들이 흔들리지 않자 의병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 고사훈과 김만석을 34일 대정읍 안성리 외곽에서 총살했다.

고사훈과 김만석이 총살 당하고 의거가 불발로 끝나자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의병항쟁에 적극 가담했던 김재형·부우기·김석윤 등은 체포돼 유배길에 오르며 제주의병항쟁은 막을 내려야 했다.

이처럼 제주의병항쟁은 비록 모병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지만 일제의 침탈에 대해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무력 항일투쟁이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훗날 항일독립운동을 고취하는 계기가 됐으며, 무오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제주해녀항일운동, 제주농민조합운동 등 일제 강점기 동안 이어진 항일운동에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주의병항쟁의 뜻을 높이 사 1977년 제주시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의병항쟁기념탑이 건립됐다

고사훈 의병장=제주의병항쟁 당시 의병장을 맡아 선두에서 항쟁을 이끌었던 고사훈(高仕訓, 1871~1909)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1133번지에서 제주가 본관인 고영길(高永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늑결된 것과 호남의 의병장인 최익현과 신돌석이 의거에 기치를 올렸음을 전해들은 고사훈은 그들과 행동을 함께할 것을 결의하고 제주시 광양동의 조병생의 집에서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김재돌 등과 모여 의병 활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다.

이후 의병장으로 추대된 고사훈은 1909210일 의병운동을 거도적인 규모로 확대, 항일운동으로 전개하기 위해 동지인 김만석과 함께 대정에서 창의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했지만 돌아오는 길 경찰에 체포돼 34일 안성리에서 김만석과 함께 총살돼 순국했다.

고사훈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돼 있으며, 정부는 고사훈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의병 규합을 위해 뿌린 격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라 은혜에 대한 충정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이다.

만약 자식으로써 부모의 곤궁함을 구하지 못하면 불효요, 나라의 위급함을 걱정하여 나서지 않는다면 불충이 되는데, 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교활한 왜적이 병자년 이래 감언이설과 강압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더니,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려 하고 있다.

이제 우리 눈앞에는 왜적의 무리가 강산을 짓밟고 있는데. 그대로 두면 이 강토를 송두리째 삼킬 것이요.

우리들은 왜적의 노예가 될 터이니 이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으랴.

오호라 천도가 무심하리오 경향 각지의 충의로운 지사들은 국권 수호를 위해 궐기하였다.

우리 제주 백성들도 충성을 다하여 은혜에 보답하고 자손만대에 조상의 무덤을 지키게 할 때가 왔도다.

피끓는 충의로운 지사는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해 나라의 국운을 회복하고 성은에 도답할 자는 의성을 같이 불러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키는 데 삶과 죽음을 같이 한다면, 이보다 다행하고, 이보다 더한 충효가 어디 있으랴. 피끓는 충효지사들이여, 팔뚝을 걷어 붙이고 총궐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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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재 2019-01-21 09:38:35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주의병항쟁의 구체적인 기술이 부족합니다. 대정군에서 모병된 숫자가 약 400여명, 제주군 중면에서 60여명의 무장돌격대 등 각처에서 총 2,000여명이 참여한 대단위 의병항쟁이었다는 사실을 좀더 논문(한말 제주의병항쟁의 전개와 성격)을 통해 보완 했으면 고맙겠습니다.
-제주항일역사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