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제주인의 숭고한 애향정신, 계승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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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순, 문학박사/논설위원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재일코리안,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동포, 재일교포’라고 정의한다. 이 중 출신 고향에 대한 정체성과 연대감이 강한 동포들을 꼽는다면 단연 제주출신일 것이다. 그들을 우리는 재일제주인이라 부른다.

1세대 재일제주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징병·징용으로 강제 이주되었거나 제주4·3사건과 한국전쟁을 피해 건너간 일부를 제외하면 경제적 이유로 도일한 경우가 많았다. 출가해녀, 직공, 방직공 등 노동시장 진출이 목적이었다. 먹고 살기위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이주였다.

1923년부터 시작된 제주-오사카 간 정기선 군대환(君代丸) 운항은 제주인 도일 증가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군대환을 타고 오사카로 건너간 제주인은 해마다 늘어 1934년에는 5만 명에 달했다.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제주인들은 오사카 이쿠노구, 도쿄 미카와시마 등의 대도시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다.

특히 오사카 히가시나리쿠(지금의 이쿠노구·히가시나리구)는 ‘일본 속 제주’라고 불릴 만큼 많은 제주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곳에 시장이 생기고 친목회 등 많은 제주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다른 지역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재일제주인들은 일본인이 꺼리는 유리·금속·고무·화학·방직공장 등에서 일했다. 하루 14시간이상 노동했고 밥과 된장국, 단무지로 허기를 달랬다.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밤에는 날림으로 지은 좁은 노동자 숙소에서 서로 닿지 않도록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그들은 한 달 20엔 정도를 받아 고향으로 17엔을 송금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한시도 고향을 잊지 않았다. 성공하여 고향에 빨리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고향 발전을 위한 아낌없는 지원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지원 사업은 의료시설비, 감귤묘목 보내기 운동을 비롯하여 전기, 전화, 수도, 도로포장, 마을회관건립 등의 공공사업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체육 등의 분야로 확대되었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재일제주인의 숭고한 고향사랑이 제주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재일제주인 도일의 역사는 이제 100년을 넘어섰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것만 찾는 시대다. 100년 역사가 우리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는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재일제주인(재외도민) 삶의 역사를 체계화하고 보전하고, 가시화하여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제주도 차원의 박물관(전시 공간)을 설립하여 책임 있는 운영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조직의 책임자가 바뀔 때마다 설립 취지조차 무시되어 본연의 목적이 왜곡되고 공들여 회복한 신뢰관계마저 깨트리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이제 성숙한 방법으로 그들의 숭고한 애향 정신을 기려야 할 때다. 재일제주인 사회는 1세에서 2세~4·5세로 세대교체되고 있다. 후세대들이 제주를 찾아도 맞아 줄 친인척 또한 세대교체 되어 점점 줄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지나간 역사의 한 장으로 치부해 후세대 교육을 소홀히 한다면 그들의 존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갈 것이다. 재일제주인(재외도민, 후세대)들이 제주를 찾았을 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고향 제주를 느낄 수 있는 공간, 제주에 사는 후세대가 재일제주인을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제주인 후세대들이 서로 만나고 보고 배우고 체득할 수 있는 공간, 박물관이 설립되는 날을 꿈꾼다. 재일제주인의 숭고한 고향 사랑 정신을 많은 사람이 알고, 후세대에 영원히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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