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수령 관아(官衙)에 버금간다 해 이아(貳衙)라 했다
(109)수령 관아(官衙)에 버금간다 해 이아(貳衙)라 했다
  • 제주신보
  • 승인 2019.01.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친은 선무랑 김덕현·부인은 의인강씨…슬하에 봉적 등 여섯 아들
조정에 말 200필 바쳐…임금이 금군·훈영군·어영군에 나눠 지급해
김하정과 의인강씨의 합묘. 김하정의 무덤은 대정읍 모슬봉 북서쪽 기슭 남동향에 있었는데 1771년 한경면에 합묘로 조성됐다.
김하정과 의인강씨의 합묘. 김하정의 무덤은 대정읍 모슬봉 북서쪽 기슭 남동향에 있었는데 1771년 한경면에 합묘로 조성됐다.

비석, 과거로의 여행

비석의 기록은 과거 우리가 모르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과거의 시대 정보가 사라지는 것은 역사의 말살이며, 자신의 뿌리를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된다.

留鄕座首金公 宜人吳氏之墓

公諱德亨貫慶州生於康熙癸丑終於雍正丙辰四月初五日月二日至于乾隆乙巳□□禮合窆于祿木岳背子之原生一男座首夏鼎生二女長適姜聖輔氏貫軍威生於康熙甲寅終於乾隆戊寅三次適姜聖珪有孫五人長別監鳳迪次幼學麟迪次座首龍迪次別監龜迪次幼學聖迪.’(는 비석에서 지워진 부분)

위의 김하정(金夏鼎)의 아버지인 김덕형(金德亨)과 어머니 오씨의 비문을 보면, ‘본관은 경주이고 강희(康熙) 계축년(癸丑, 1673)에 태어나 옹정(雍正) 병진년(丙辰, 1736) 45일에 세상을 떠났다. 건륭(乾隆) 을사년(乙巳, 1785)에 이르러 공은 군위 오씨와 예로써 녹목악(祿木岳) 뒷자락 북쪽에 합장했다. 슬하에 12녀를 두었는 데 아들은 좌수를 지낸 김하정(金夏鼎)이고, 큰딸은 강성보(姜聖輔)에게 시집을 갔으며 작은 딸은 강성규(姜聖珪)의 처가 되었다. 아들에게서 손자 다섯이 있었는 데 큰 손자가 별감 봉적(鳳迪)이고, 둘째가 유학(幼學) 인적(麟迪)이며, 셋째가 좌수(座首) 용적(龍迪), 넷째가 별감(別監) 구적(龜迪), 다섯째가 유학(幼學) 성적(聖迪)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

『 留鄕座首金公宜人姜氏之墓 』

□□□□□□慶州後人康熙丁丑正月初五日生戊午十二月初二日終翌年九月十七日卯時葬于大靜摹瑟岳亥龍亥坐巳向之原娶留鄕座首姜汝敏之女生五男長曰鳳績次曰麟績三曰龍績四曰龜績五曰鵬績庶子曰熊績.’

김하정의 비문은 위의 내용과 같고, 비 측면에는 乾隆辛卯(1771)兩位遷移合窆이라 새겨져 있다.

비석과 세보(世譜)를 종합해 보면 김하정은 강희(康熙) 정축년(丁丑, 1697)에 태어나 무오년(戊午, 1738) 122일에 서거했고 이듬해(1739) 917일 묘시(5~7)에 장례를 지냈다.

원래 김하정의 무덤은 대정읍 모슬봉 북서쪽 기슭에 남동향으로 무덤이 있었는데 건륭(乾隆) 신묘년(辛卯, 1771)에 묘를 이설해 부부 합장을 했다.

부인 강씨(姜氏)는 유향좌수를 지낸 강여민(姜汝敏)의 딸이다.

강씨와의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 데 큰아들이 봉적(鳳績)이고, 둘째가 인적(麟績), 셋째가 용적(龍績), 넷째가 구적(龜績), 다섯째가 붕적(鵬績)이다.

또 배다른 아들(庶子)로는 웅적(熊績)이 있는데 누구의 소생인지는 모르겠다.

앞서 두 비석에서 보면, 김덕형은 군위 오씨와의 사이에 12녀를 두었고, 광주 김씨와 그의 아들 김오정은 보이지 않는다.

김하정은 아들이 여섯인데, 아들들의 이름 끝 자의 한자가 다르다. 아버지의 비석에는 봉적(鳳迪)으로, 아들의 비석에는 봉적(鳳積)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 비석에는 손자로 서자(庶子)가 보이지 않으나 아들의 비석에는 서자(庶子) 웅적(熊積)이 보인다.

또 다섯째 손자인 성적(聖迪)의 초명은 붕적(鵬適)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하정의 아버지 김덕형은 벼슬이 선무랑(宣務郎)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군위 오씨이고 광주김씨 소생으로 배다른 아들로 김오정(金五鼎)과 김응필(金應弼)이 있었으나 응필은 어릴 때 사망했다.

 

248년 동안 김하정 무덤을 지킨 동자석.
248년 동안 김하정 무덤을 지킨 동자석.

200필을 바친 김하정

김하정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에 영조 12년 병진년(1736) 521(갑인)의 기록에, 제주(濟州)의 백성 김하정이 개인 말 200()을 바치기를 원한다고 목사(牧使) 김정(金亻政)이 계문(啓聞)했는데, 김재로가 받도록 청하기를, “이번에 만약 물리친다면, 아마도 먼 지방 사람의 정성을 저버릴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금군(禁軍훈영군(訓營軍)어영군(御營軍)에게 나누어 지급하도록 명했다.

김하정의 배다른 동생 김오정은 노인직으로 절충장군의 직위를 받았는 데, 이 노인직은 수직(壽職)으로 나이 80세가 되면 양천(良賤)을 막론하고 가자(加資) 되었다.

김오정에 대해서는 정조 16년 임자(1792) 12(임신)대정(大靜) -사서인(士庶人) 절충장군 김오정이다. -노인직(老人職)에 대해 하비(下批)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또 그로부터 2년 뒤인 정조 18년 갑인(1794) 31(무자) 제주 어사(濟州御史) 심낙수(沈樂洙)의 장계에, “대정현에 양반으로서 90세 이상인 남자 노인은 가선대부 훈련원 판관 김오정 등 양반 2인 상민(常民) 6인 여자 노인 5인 등 총 11인에게는 1인당 전미 3, 황육 3, 정목 5자씩을 분급했는데, 분급한 전체 수량을 합하면 전미가 23, 황육이 33, 정목이 120자이다.”라고 했다.

지방 행정의 유력자 좌수와 별감

유향좌수는 유향소의 우두머리로 유향소는 고려 때 사심관 제도에서 유래한다.

사심관(事審官)이란 고려 때 서울에 있으면서 고향의 일에 관여(參涉)하던 벼슬아치였다.

각 고을마다 유향소(留鄕所)와 경재소(京在所)를 설치한 것은 한 고을의 풍속을 규정(糾正) 하기 위한 것으로 고을의 민치(民治)를 돕기 위해 그 고을에 사는 유력한 자를 가려서 좌수(座首)별감(別監) 등의 향직(鄕職)을 주었는 데, 이들의 직소(職所)를 유향소라 했다.

경재소(京在所)는 지방 관청이 서울에 설치한 일종의 출장소로, 해당 고을의 중앙 관청에 관계된 사무를 처리하고, 지방 호족을 감시하기 위해 그 대리를 서울로 오게 해 지방 세력을 압박하던 곳이었으나 선조 36(1603)에 수령권이 강화를 이유로 혁파됐다.

여말선초에는 유향품관(留鄕品官), 재지품관(在地品官), 또는 한량품관(閑良品官)이라 해 지방의 유력자나 벼슬에서 은퇴한 자를 택해 지방의 풍속을 교화하고 향리의 부정을 막도록 지방의 민치에 활용됐고, 이후 중앙집권에 역행하게 되자 태종 6(1406)에 폐지했다.

다시 세종 10(1428)에 품관의 인원수를 정하고 수령과 경재소를 두고 유향소를 감독하게 하는 것으로 정비해 과거 재지사류(在地士類)의 결합체였던 유향소는 행정기구의 일부가 되었다.

유향소의 폐해가 커지자 성종 20(1489)에 이를 개혁해 지방 풍속의 조정과 향리의 규찰을 위해 좌수와 별감을 두고 체제를 정비했다.

그 임원은 향임(鄕任), 혹은 감관(監官향정(鄕正)이라고 해 주()와 부()에는 4·5, ()3, ()2인씩을 두었으나 후에 그 인원이 점점 증가했다. 임원인 좌수와 별감은 향사인(鄕士人: 在地士族)으로, 선거에 의해 수령이 임명됐으며, 수령이 바뀌면 다시 뽑을 수도 있었다.

이들의 직임(職任)은 육방으로 나누어 좌수가 이방과 호방을, 좌별감이 호방과 예방을, 우별감이 형방과 공방을 맡아보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많을 때에는 따로 창감(倉監), 고감(庫監) 등 이름을 붙이면서 다수가 될 때도 있었다.

유향품관을 줄여서 흔히 품관이라 칭하고, 유향소를 향소 또는 향청이라고도 하며, 수령의 관아(官衙)에 버금간다 해 이아(貳衙)라고도 한다.

그래서 유향소가 수령과 결탁하게 되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 좌수 김덕형, 본인 좌수 김하정, 김덕형의 손자의 관계에서 보는 것처럼, 큰 손자 별감 봉적이고, 셋째 손자가 좌수 용적, 넷째 손자가 별감 구적으로 볼 때 김덕형 집안이 대정현의 권세 있는 지방사족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