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밑거름으로 자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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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철 제주대학교 화학·코스메틱스학과 교수

저 탱탱한 젖꼭지 같은 꽃망울/겨우내 뜨거움 감추고 있었을 뿐이지/어둠 속에 묻어 둔 봄의 숨소리/이제 깨어나라는 봄바람의 속삭임에////연한 꽃 향기가 흐르는 봄밤/차갑던 추억이 거짓말처럼 잊혀지고/허연 달빛도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걸어가고 있다//.’(이가희의 매화꽃이 필 무렵)

20181223. 정원으로 시집온 세 그루 매화나무가 연둣색 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 중 한 그루는 참는 것이 고통이었는지 몇 개의 꽃망울을 터뜨렸다. 봄기운은 아직 요원하고,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고, 꽃은 안쓰럽다.

눈이 내린다. 하얀 눈송이의 장난에 매화의 올망졸망 망울과 꽃이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동백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까치의 깃털도 부옇게 떨고 있다. 그러나 빨간 동백꽃은 흩날리는 눈발을 즐기는 것 같다.

정원에 부분적으로 자리를 차지한 페퍼민트가 너무 의젓하다. 한파에도 푸른빛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고운 향기를 간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가꾸는 페퍼민트가 가상하다.

푸른빛과 향기의 고향은 서서히 동토로 변하고 있다. 페퍼민트의 그물같은 뿌리는 동토를 품고, 말없이 눈보라를 끌어안는 그의 모습이 애틋하다. 그런데 페퍼민트는 자신의 영역에 띄엄띄엄 모습을 들어낸 금송화의 힘빠진 주황색을 다독거리고 있다.

금송화가 다음 봄을 생각하면서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것은 늦봄부터 눈내리는 한 해의 끝자락까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이른 아침에도 불빛 아래 어둠 속에서도 잔잔한 웃음을 선사했다.

금송화를 뽑아 정원의 빈틈에 흩뿌리고 밟아주었다. 침묵의 흙 속으로 금송화를 돌려 보냈다. 이의 씨앗은 흙과 묵언정진하면서 내일을 꿈꾸고 있다. 다음 해에는 더욱 멋있는 꽃과 향기로 환생할 것이다.

페퍼민트 뿌리는 빈틈없는 거미줄 보다 더 촘촘하고 강하게 망을 형성하여 동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외형상 연약하게만 보이던 페퍼민트의 뿌리는 강건한 삼차원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곡괭이로 페퍼민트 뿌리를 파헤쳐보면, 뿌리 형태와 기능에 의해 지구의 거대한 생물학적 다양성 내에서 식물이 성공적으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진화적 측면을 돌이켜 보면 식물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장 최선의 전략을 수립했음을 알 수 있다.

금송화의 최적 삶을 위해 페퍼민트가 없는 곳을 이의 보금자리로 선택했다. 봄바람의 속삭임에는 다시 여리고 여린 새싹과 마주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렌다. 처음에는 잡초와 구별하지 못하고 금송화 새싹을 제거한 후 코끝이 아렸다.

작년에는 페퍼민트 속 도라지꽃을 바라볼 때마다 슬픈 전설처럼 깊은 산 속 절에서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침묵이 잉태한 선명한 보라색이 너무 의연하고 처연했다. 침묵이 토하는 힘에 저절로 숙연해졌다. 이 꽃을 통해 색깔과 침묵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다.

누군가 표현했다. “언어가 문을 닫은 침묵 속에서 내 깊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그 안에서 내 얼굴을 본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바탕인 침묵을 감내할 능력을 상실했다. 인간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소리와 교향곡은 어디에서 생성될까?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소음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의지가 없는 것 같다. 환경소음보다 인간소음이 더욱 우리의 삶을 피폐시키고 있다. 타인에 대한 험담, 24시간 무의미하게 울려되는 카톡소리 등 인간이 생산하는 소음을 찾아 현대인들은 방황하고 있다.

봄의 숨소리와 연한 꽃 향기를 감춘 탱탱한 젖꼭지 같은 꽃망울은 침묵으로 엄동설한을 극복하는 명작영화의 한 장면이다. 페퍼민트 속 도라지꽃과 금송화는 동백나무에 의지하여 자연의 소리를 음미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의 소리를 표출하기 위해 고독을 밑거름으로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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