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스카이 캐슬’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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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평론가

강준상은 혜나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고 골프 약속을 지킨다. 나중에야 사랑했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기 딸을 죽이고 말았음을 알고 오열한다. 어머니의 뜻대로 의대를 욕망하고, 병원장을 욕망하며 살아온 ‘꼭두각시 삶’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꼭 주남대 병원장이 아니어도 어머니의 아들 맞잖아요? 나 그냥 엄마 아들이면 안 돼요?”라고 울부짖는다. 아내 한서진(곽미향)을 향해서는 “당신도 욕심 내려놔. 예서 인생하고 당신 인생은 다른 거야.”라고 말한다.

「SKY 캐슬」은 허구적 욕망에 매달리는 지금의 우리를 까발린다. 삼 대째 의사 집안이기를 욕망하는 사람들, 가족을 욕망하다 죽임을 당한 혜나, 잃어버린 권력욕을 딸과 아들에게 투사하는 차 교수, 정신질환자가 된 제2의 아인슈타인이었던 딸을 두고 ‘저승사자’가 된 김주영.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서 꿈틀대며 시청률을 20%까지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들의 욕망은 자발적 욕망이 아니다. 르네 지라르(Rene Girad)가 말하듯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있는 매개자(mediator)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종교인이 신의 욕망을 모방하듯, 마담 보바리가 로맨스 책을 보며 파리 여자들의 사치스럽고 낭만적인 여주인공의 사랑 얘기에 빠져 고유한 목소리와 판단력을 잃어버리듯. 형이상학적 욕망은 결코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 강렬하게 꿈꾸던 연인을 만나 결혼에 골인했으나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처럼, 인생의 목표가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을 찾아 달려간다. 신이나 영웅을 믿던 시대는 이상적 존재의 욕망을 모방하여 평화로웠을 수 있으나, 민주화 시대엔 우상을 대신해 수많은 라이벌을 갖고 서로가 서로의 신이 된다. 부러움, 질투, 증오, 무기력이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과 폭력에 감염된다.(『속임수, 욕망, 그리고 소설』, 1965.) 「SKY 캐슬」은 지금 우리의, 그와 같은 욕망의 얽힘과 폭력적 상황을 잘 그려냈던 것이다.

욕망은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그런 욕망을 충족하려면 온갖 열정을 쏟아야 한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 매개자 없는 진정한 욕망은 어떤 것인가? 최근에 나온 『독일 교양 이데올로기와 비전』(이광주, 도서출판 길)은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훔볼트는 대학 제도를 바탕으로 학문을 통한 교양, 학문의 자유를 꿈꾸면서 전문직이 교양 시민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은 관료 집단을 이루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신분과 지위를 보장받으려 했다. 노발리스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중세, 민족이라는 매개자를 욕망하면서 반근대적 기치를 내걸었다. 그와 같은 지식인 집단들이 이어지면서 비정치적이며 반사회적인, ‘특이한 길’을 독일이 걸어왔다고 이광주는 말한다. 그러면서 “자유는, 개인적이면서 그만큼 진정으로 사회적인 자유는 현실과 맞선 슬기로운 정치적 사유와 실천에서 싹트고 발전한다.”(376쪽)라고 한다.

자유는 진정한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사회 현실과 맞서지 않는, 속물적이며 매개된 욕망은 허구다. 진정한 자유, 욕망을 하려거든 사회 현실과 만나 슬기롭게 사유하고 실천해야 한다. 아뿔싸, 사적 욕망으로 법을 집행한 자가 사법농단으로 구속 수감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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