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 무장 항일운동
(4)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 무장 항일운동
  • 강경태 기자
  • 승인 20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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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보다 앞선 도민 항일투쟁…김연일·방동화 스님 등 주도
700여 명 주민 선봉대 꾸려 제주경찰서 중문주재소 습격·방화
왜곡 역사 바로잡고 1999년부터 성역화 사업…의열사 등 조성 
서귀포시 하원동 법정사 일대에 세워진 의열사 전경. 2004년 준공됐으며, 항일지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귀포시 하원동 법정사 일대에 세워진 의열사 전경. 2004년 준공됐으며, 항일지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은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가장 먼저 일어났다.

기미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났으며,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 스님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신도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줬고, 19183월 주도세력을 결집하고 항일운동 거사를 표명했다.

당시 항일운동 주도세력에 참여했던 이들은 법정사에 주거하고 있던 방동화, 강민수, 정구용, 김인수, 김용충, 장임호 스님 등이다.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세력들은 19187월 법정사 신도들에게 거사의 뜻을 밝히고 참여를 권유해 신도는 물론 지역 농민들을 모아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주도세력은 9월 강창규, 김산만, 김봉화, 양남구, 최태유, 강봉환 등이 가담해 13명으로 늘어났으며, 마을에 배포할 격문과 곤봉, 화승총 3, 깃발을 제작하며 항일운동을 준비했다.

9월 말 정구용은 각 구장 앞으로 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107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는 격문 3~4통을 만들었다.

이후 주도세력은 서로 역할을 분담해 부서를 편성했고 각 부서의 책임자를 정한다.

 

조직은 크게 둘로 나눠 총지휘 김연일을 중심으로 그를 보좌하는 좌대장과 우대장을 뒀고, 강창규 선봉대장을 중심으로 선봉좌익장과 선봉우익장, 이들 밑에 법정사 신도들로 구성된 선봉대를 꾸렸다.

또 참여한 지역주민을 중간에서 지휘할 수 있도록 중군대장과 후군대장을 배치해 군중 사이에서도 선봉대장 역할이 이어지도록 했다.

항일운동은 1918107일 새벽에 실행됐다.

선봉대장 강창규와 박주석, 장임호, 정구용 등의 지휘를 받고 선봉대 34명은 기도를 올리고 법정사를 출발했다.

이들은 산을 내려온 뒤 도순리, 영남리,호근리 등 마을을 돌며 참여자를 모집했다.

구장에게 민적부를 받아 장정들을 모집했지만, 예상한 만큼 인원이 참여하지 않자 강창규는 박주석과 논의 끝에 서귀포 습격을 중지하고 제주경찰서 중문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강정리를 거쳐 도순리로 향하는 길에 강창규는 강정리와 도순리 사이 대천의 전선과 전주 2개를 절단해 서귀포와 제주읍내 간 통신을 단절하기도 했다.

항일봉기대가 하원리를 거쳐 중문리에 도착했을 때 인근 마을에서 참여자가 더욱 늘어 참여 인원은 약 7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제주경찰서 중문주재소를 습격해 물건들을 몽둥이로 부수고, 기구와 문서 등을 불태웠다.

이후 오전 11시 연락을 받고 출동한 제주경찰서 서귀포주재소 기마순사대가 총격을 가하자 참여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항일운동은 막을 내렸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주요 가담자 총 66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이들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4차례에 걸쳐 송치됐다. 18명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재판을 받기 전 선봉대장 강창규 동생인 강수오, 강춘근 2명이 옥사했다.

재판을 통해 31명이 징역형, 15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항일운동을 주도한 김연일 스님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과 가출옥으로 실제 32개월을 복역했다.

 

2011년 준공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모습.
2011년 준공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모습.

징역형을 선고받은 31명 가운데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김두삼, 김봉화, 박주석 등 3명은 옥사했다.

또 벌금형을 선고받은 15명은 벌금 30원을 납부하지 못해 30일간 노역장에서 노동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공장에서 일하던 제주출신 직공의 월급이 20~25원 정도였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의 파급을 우려해 운동의 주도세력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유사(類似) 종교 단체로 규정했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불온한 사상을 가진 보천교도들이 무장봉기해 사회적 불안을 야기한 보천교도의 난으로 폄하됐다. 실제로 1994년까지 도내에서 발행된 각종 자료에도 보천교도의 난으로 소개됐다.

왜곡된 사건의 진실은 지역 주민 26명으로 구성된 가칭 법정항일운동사업추진위원회199410월 서귀포시에 제주 최초이자 최대의 항일운동 발원지인 법정사 일대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법정사 항일운동 참가자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연일(1993), 방동화(1995) 등에게, 애국장을 박주석(1990), 강창규(2005) 등에게 추서했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서귀포시 하원동 법정악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운동 이후 일본경찰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건물의 기단석과 기둥 흔적인 현무암 더미가 남아있다.

법당 주변에는 당시 식수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성역화 사업은 199912월 기본실시설계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311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일대 189940가 제주도지정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법정사지() 일원 4406는 문화재 지정구역으로 지정됐다.

2004년까지 총사업비 38억원이 투자돼 관리사, 화장실, 주차장, 산책로, 전망대, 상징탑을 비롯해 애국지사와 항일지사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조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