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허백련·허건 등과 교류…도문화상 상금으로 청탄상 제정
(72)허백련·허건 등과 교류…도문화상 상금으로 청탄상 제정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9.0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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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추, 제주도의원·서화가…서예 모임 담담회·영주연묵회장
김광택, 조천의 이동김씨…대대손손 훌륭한 후손들 배출
김광현, 제주판관…삼읍 교수로 인재 선발해 ‘칭송 자자’
김광협, 도민의 향토적 서정 노래하고, 제주 방언 대중화 힘써

김광추金光秋1905(광무9)~?. 서화가. 제주도의회 의원. 자는 익진益鎭, 호는 청탄聽灘. 본관은 김해이며 제주시 화북<벨도>에서 태어났다.

19193월 졸업, 1923년 상경,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동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과 김복진金復鎭, 또 삽화가揷畵家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 등을 사사했고 예술에 대한 관심과 회화에 안목을 넓히는 계기를 가졌다.

1928년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회화에 뜻을 두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2년 귀국과 동시에 모교인 화북사립보통학교 교사로 1년 재임한 후 다시 도일, 많은 식견을 넓혔다.

1936526일 화북교의 옛날 은사 목우 김문준이 항일운동으로 투옥 순국했다.

오직 서예 활동에 몰두하면서 분재盆栽, 수석壽石, 사진, 도예, 전각 등 다방면에 걸쳐 예술 활동의 폭을 넓혔다.

서풍書風은 원만 순후淳厚하며 소필 글씨에 능했다.

 

김광추金光秋의 글씨.
김광추金光秋의 글씨.

1942년 일본 아시히 카메라주최 사진콘테스트에서 작품 나루터를 출품해 입선됐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제주신문 창간에 참여하기도 하고 1948년 제주의 4·3 사건으로 혼란해지자 광주光州로 건너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남농南農 허건許健, 천경자千鏡子 등 예술인과 교유했다.

1949년 제3차로 일본에 건너가 살다가 1957년 다시 귀국, 19604·19가 일어나고 동년 12월에 제3대 제주도의회 의원으로 출마, 제주시 제1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김광추는 1963년 서예 동호인의 모임인 담담회淡淡會와 영주연묵회瀛洲硯墨會의 창립에 동참해 10년 동안 회장직을 맡았다.

김광추는 1977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하고 상금 전액을 제주미술전람회에 써 줄 것을 바라고 이 해부터 청탄상聽灘賞이 제정됐다.

필자의 변 : 청탄이 생존 시에 거주한 화북 마을에 있는 그의 고택古宅에 방문해 보았더니 정원 모퉁이에 난실蘭室이 마련돼 있었다. 난초보다 더 향기로운 청탄의 인격적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김광택의 묘비.
김광택의 묘비.

김광택金光澤1746(영조22)~1838(헌종4), 선비. 본관은 김해이며 조천읍 조천리<조천포>에서 태어나 신장은 6척이 못되었다.

나이가 80이 지나서도 녹발綠髮이 이마를 덮어 훨훨 날렸다.

당시 잠영세족簪纓世族이라고 자칭하던 축신逐臣 유배객 유성락柳成洛이 김광택을 한번 보고서 두 번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영주 땅에 와서 처음으로 선인仙人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이때의 사람들의 흠모함도 이와 같았다. 조천의 이동梨洞김씨라 해서 이후부터 대대로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됐으니 응전膺銓과 응빈膺斌은 그의 증손이며 명식明植과 시용時容5대손이 된다.

김광현金光鉉1722(경종2)~?, 문신. 제주판관. 평안도 정주에서 출생, 자는 길보吉甫, 본관은 연일, 정희鼎禧의 아들이다.

1771(영조47) 문과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5(영조51) 2, 전우성全宇成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77(정조1) 8월에 떠났다.

판관 김광현은 제주 삼읍의 교수를 겸직해 시취했고,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후일 그에 대한 비가 세워졌다.

김광협金光協1939(일제강점기)~1993, 시인. 언론인. 본관은 광산. 1963년 월간 신세계빙하를 위한 시로 제1회 신인문학상에 당선, 1965년 동아일보에 입사,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강설기降雪期라는 시로서 문단에 데뷔했다.

동아일보 편집위원과 심의위원을 거쳐 음악동아편집장 등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펴 왔다.

서귀포시 호근리<호근-머들>에서 김남운金南雲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귀중, 서귀농고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쳤다.

1966년 한미협정이 있던 시기에 쓴 초기의 시 대통령에게등의 발표로 그는 청년문학가협회 권익옹호위원회의 간사로 활동한 것이 용공容共이라는 혐의로 19688월 당시 중앙정보부에 20여 일간 구금 생활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펜클럽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관훈寬勳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다.

김광협의 시 세계를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생명의 지순함과 가치를, 중기에는 농민의 건강한 삶을, 후기에는 제주도민의 향토적 생활을 노래했다. 1974현대문학상을 받고 1981년 문예진흥원이 주관하는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서귀포 천지연 광장에 있는 김광협 시비.
서귀포 천지연 광장에 있는 김광협 시비.

시집으로 강설기’(1970), ‘천파만파’(1973), ‘농민’(1981), ‘황소의 탱크’, ‘예성강곡’(1983),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1984), ‘유자꽃 피는 마을’(1990), ‘산촌서정’(1992) 8권의 시집과 번역서로 아메리카 인디언 청년시집’(1992), ‘투르게네프 산문시’(1992), ‘미국의 공해정책론등을 남겼다. 또 저서 시와 주관’, ‘정지용 연구시론이 있으며 제주 사투리로만 쓰는 시를 시도해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4시집을 발표하면서 제주 방언의 대중화에 힘써 모든 제주인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19961026일 서정과 풍자의 시인 김광협을 기리는 시비詩碑를 서귀포 천지연 광장에 우뚝 세웠다.

서귀포문인협회와 지역민, 지기知己 등으로 구성된 김광협 시비건립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단성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1998926일 서귀포시 토평동에 있는 김광협 시인 부가父家 앞에 사적지 시인 김광협 표징비제막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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