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의 마지막 왕파리를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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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익, 시인·수필가·문학평론가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생활문화는 발전하기 마련이다.

수십 년이 지나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미국의 소설가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오른다. 마주한 건물의 담쟁이덩굴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생각하는 소녀는 마지막 담쟁이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노 화가는 무리를 무릅쓰고 마지막 잎새를 벽에다 그려놓고 절명한다.

그 소녀는 담쟁이 잎 하나를 보면서 새 생명을 얻는다는 내용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려놓은 담쟁이 잎 하나에 생의 기쁨을 느꼈던 소녀는 그 노 화가의 절명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마지막 잎새’의 감동은 지금도 영원하다.

발명왕 에디슨은 전구 하나를 발명하는데 무려 2000번의 노력을 거듭했듯이 인간에게는 무한히 진화하려는 장점이 있다. 웬만한 것은 힘 안들이고도 발명에 준하는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한다.

나는 여자화장실은 당연히 모르지만, 문제는 하루에 대여섯 번은 이용하기 마련인 남자 화장실이다. 들어서면 퀴퀴한 냄새가 풍긴다. 남자는 소변 후에 한두 번 털고 나오는 버릇 때문에 소변기 주위가 지저분하다. 본인의 볼 일이 아니라면 화장실에 무슨 일로 가겠는가.

생활문화는 항상 편리한 쪽으로 향상된다. 수십 년 동안 치약의 뚜껑을 돌려서 열었으나 어느 날 누구의 아이디어로 원 터치 캡이 됐다.

금융기관, 동사무소 등에서 오래 줄을 서서 업무를 봤던 것이 엊그제 같다. 지금은 대부분의 입출금은 기계로 간단하게, 동사무소도 번호표 순서대로 원 스톱 처리를 하고 있으니 많이 편리해졌다. 모르는 사이의 발전이다.

화장실 문화는 어떤가. 마지막에 ‘반드시 꼭지를 누르세요’부터 발전해서 지금은 웬만한 곳이 전자 감응 식이다. 그렇지만 전자 감응 식은 필요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의 아이디어로 소변기의 적당한 위치에 왕파리를 그려 놓았다. 일부러 파리를 떨어뜨리려고 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파리 위에 정 조준해서 볼 일을 보기 마련이다.

아직은 병원, 버스터미널, 공공기관 등에 주로 왕파리가 그려진 소변기가 있지만, 별로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니 급속히 불어날 것이다.

엊그제는 제주시의 조그만 식당에서도 왕파리가 그려진 소변기를 보았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설치하면 수명도 오래 가서 일거양득일 터이다.

‘마지막 왕파리’에 무의식적으로 이용해도 깨끗한 화장실을 유지할 수 있으니 누군가의 기발한 착상이다.

향후 왕파리에 정 조준해서 볼 일을 보면 향수가 뿜어져 나오는 것도 상상이 가능한 일이다. 볼 일도 보면서 향수도 맡을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은 일이겠는가.

공공기관, 버스 터미널, 식당 등의 화장실에 ‘마지막 왕파리’가 그려져 있는 부분은 과학적(?)이어서, 볼 일을 완료한 사람이 물러서도 주위를 지저분하게 하지 않는 이점이 있었다.

문득 아무개의 아이디어로 생활전체가 편해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고쳐지지 않고 있으면 늘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화장실이 아니겠는가. 누군가는 고쳐야 할 일들이 일상에 많이 있다. ‘마지막 왕파리’를 어렵게 생각한 사람처럼 새로운 생각이면.

마지막 왕파리를 구상했던 사람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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