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집집마다 돌담을 쌓게 했더니, 사소한 다툼이 줄었다
(73)집집마다 돌담을 쌓게 했더니, 사소한 다툼이 줄었다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9.0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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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제주판관 등 역임…고종 실록 편찬 참여
김구오, 뛰어난 글씨로 대성 
김국배, 제주민요 ‘오돌또기’ 편곡
김군천, 김녕굴 개척·보존에 일생 바쳐
1960년대 제주시 남문로터리 위쪽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밭의 경계를 표시하는 돌담이 보인다. 제주판관 김구는 경작지의 경계선을 만들고 집집마다 돌담을 쌓아 두르도록 했다. 이렇게 새로 쌓은 밭담과 집의 울담은 소유하고 있는 땅의 경계 표시가 되어 서로의 다툼을 없애주는 구실을 해주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60년대 제주시 남문로터리 위쪽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밭의 경계를 표시하는 돌담이 보인다. 제주판관 김구는 경작지의 경계선을 만들고 집집마다 돌담을 쌓아 두르도록 했다. 이렇게 새로 쌓은 밭담과 집의 울담은 소유하고 있는 땅의 경계 표시가 되어 서로의 다툼을 없애주는 구실을 해주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구金坵1211(희종7)~1278(충렬왕4), 고려 문신. 학자. 제주판관. 본관은 부령扶寧(현재의 부안扶安).

초명은 백일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과거시험에서 2등으로 급제했다.

김구가 제주판관으로 있을 때 부사 최자崔滋는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였다.

서울에서 과장科場의 부제賦題가 전달되었는 데 매우 어려운 제목이었다. 최자가 구에게 이 제목으로 글짓기를 청하자 그는 담소자약하면서 즉석에서 글을 지었다.

최자는 문장에 더 가필할 것이 없으므로 탄복해 아들에게 이는 시부詩賦의 준승準繩이니 잘 간직하라고 했다.

동문감(東文鑑)’제주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들어 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가 판관이 되어 주민의 고통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주민이 편하게 여기는 것이 많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제주시 삼양동에 있는 김구 공덕비 앞면에는 돌 문화의 은인 판관김구선생공덕비(判官金坵先生功德碑)”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어 모아 경작지의 경계선을 만들고 집집마다 돌담을 쌓아 두르도록 했다. 이렇게 새로 쌓은 밭담과 집의 울담은 소유하고 있는 땅의 경계 표시가 되어 서로의 다툼을 없애주는 구실을 해주었고 소와 말의 침입으로부터 농작물이나 울안을 보호하는 방법이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는 1263년 우간의대부가 되었고 이어 상서좌복야·추밀원부사·정당문학·이부상서를 역임했다.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라서는 문신들의 저술을 시험을 삼아 유능한 자에게 상을 주어 권장할 것을 건의했고 중서시랑평장사를 거쳐 1274년 충렬왕 즉위 뒤에는 지첨의부사·참문학사·판판도사사를 역임했다.

당시 역관들이 간계를 부려 사실대로 통역하지 않고 사리를 꾀하는 일이 있으므로 헌의해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고 궁중 학관學館의 연소한 참외參外들로 한어漢語를 습득하게 했다.

그는 신종·희종·강종 및 고종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고 당시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때에 일을 잘 처리했다.

 

제주시 삼양동에 있는 제주판관 김구金坵 선생 공적비.
제주시 삼양동에 있는 제주판관 김구金坵 선생 공적비.

김구오金九五1822(순조22)~1900(광무4), 서예가. 자는 일이一彛, 호는 소재蘇齋, 본관은 김해, 제주 성안에서 김재원金在苑의 장남이다.

1840(헌종6)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를 왔을 때 김구오는 19세의 약관이었다.

특히 대정 적소謫所의 집주인 아들 강도순姜道淳과 애월읍 곽지리의 박계첨朴季瞻과 함께 김구오는 높은 수준의 글 솜씨로 그 명성이 길이 전해진다.

이때 추사가 김구오의 글씨를 보고 필법을 칭찬했고, 소재蘇齋의 유필은 현재 제주시의 김현우金鉉禹가 소장 중이다.

추사는 이런 꼬불꼬불한 시골에 이 천기天機야말로 청묘淸妙하네. 앓아 움추리고 헛소리인가! 경이로움을 깨닫지 못했네. 성천聖天의 천부적인 재주가 어찌 북두北斗의 아래라 해서 또는 남극의 변두리라 해서 다르겠는가!”고 했다.

이때부터 12년간 추사의 지도를 받아 글씨로 대성하고 또 김구오는 아들을 지도하니 아들 김노현金魯鉉(1845~1882)도 필명을 떨쳤다. 김노현의 자는 군현君賢, 호는 난사蘭史 혹은 우재愚齋라고 했다.

김국배金國培1912(일제강점기)~1965, 음악가, 제주음악의 개척자. 전남 목포 출신인 아버지와 제주 태생인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나 목포의 초·중등학교를 거쳐 서북지방의 명문교인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배웠다.

처음 사회로 진출한 곳이 한국교향악단의 효시인 경성교향악단京城交響樂團으로, 단원으로서 주로 바이올린을 담당했다.

1941년 일제강점기의 제주도로 들어와 남문로에서 시계수리점을 운영했다.

19484·3 사건이 일어나자 주민들을 계몽하고 위로하기 위해 제주의 예술인들이 선무공작대宣撫工作隊를 만들어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 때에 음악인으로서의 소질과 재능을 인정받아 19493월 제주여자중·고등학교의 음악선생으로 발탁됐다.

특히 선무공작대원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뮤지컬, 오페라, 악극 형식의 합창공연 등을 맡아 지도했다.

서부교회 옆 제주극장에서 악극樂劇 형식의 콩쥐·팥쥐장화홍련전등을 공연하기도 했다.

해마다 열리는 탐라문화제 서제序祭 행사에는 그가 편곡한 제주민요 오돌또기가 반드시 맨 먼저 불리어졌다.

이 곡조야 말로 제주의 신비감과 탐라 선인들의 토속적 향기를 맡게 한다.

그가 채보, 편곡한 오돌또기는 KBS 방송작품으로 공모에 응하여 최고상을 받아, 그 공로로 1964년 제3회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현재 중·고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오돌또기와 그가 작사 작곡한 제주여고 응원가는 오늘날에도 불리어지고 있다.

김군천金君天1922(일제강점기)~2011, 지방 명사, 구좌읍 김녕리<김녕>에서 태어나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원래 만장굴과 한 동굴이었던 김녕사굴金寧蛇窟은 동굴 천장이 붕괴되면서 따로 나뉜 것인데, 동굴 내부가 뱀처럼 생겼다고 해서 김녕사굴이라 불렸다.

이곳이 일찍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김녕중학교 서무주임을 지낸 김군천씨 덕택이다.

김군천은 1960년 퇴임 후 정부에서 관심도 보이지 않고 방치해 둔 고향의 김녕사굴 지킴이를 자원해 여기에 정착해 살았다.

주변 땅 12000평을 매입, 정비해 지금 도로변에 협죽도夾竹桃길 잔디밭은 모두 그가 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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